문화 > 문화일반

[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지금 흔하다고 나중까지 그러랴

등록 2023-04-22 06:00:00   최종수정 2023-04-22 10:41:38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양해남 ‘영화의 얼굴’ 보며 느낀 시간의 가치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영화의 얼굴(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3.04.1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재작년이었다. 부모님께서 당신들이 직접 지어 40년을 넘게 사시던 집에서 이사하게 됐다. 대대적인 짐 정리가 시작됐고, 40년 넘게 묵은 짐들이 몇개월에 걸쳐 조금씩 덜어졌다.

여기저기 박혀있는 오래된 짐들을 꺼내 확인하는 것은 추억을 꺼내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소중한 것들이야 다시 소중하게 보관될 테지만, 버리기에는 아깝고 가지고 있기에는 불필요한 물건 앞에서는 마치 미련처럼 머뭇거리기 마련이었다. 필요한 곳이 있다면 보내 요긴하게 사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마땅치 않기에 대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줄어든 짐만큼 기억의 부피도 줄어드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 영화수입사 마노엔터테인먼트의 오미선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무실을 이전하게 됐는데 마노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들 중 일부를 내가 운영하는 책방 노마만리에 기증하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자료들이지만 마노의 활동을 증명하는, 추억 어린 자료들이기에 버리기엔 아까운 자료들이었다. 자연스럽게 40년 동안 살았던 집에서 이사하던 때가 떠올랐다. 노마만리에 김종원영화도서관이 만들어졌으니 마노의 자료도 이곳에 보관된다면 훗날 관련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걸릴 테지만 우선 받아두고 천천히 정리하기로 하고 감사히 잘 간직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료들을 인수하기로 했다.

밤늦은 시각, 짐 정리가 한창인 마노의 사무실에 들러 마노의 역사가 담긴 자료들을 두 번에 걸쳐 차에 실어 왔다. 영화를 배급하면서 만든 포스터, 굿즈 외에도 참고용 도서, DVD와 카세트테이프 등이 한 가득이었다. 이 자료들은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내 남양주 연구실 한쪽에 보관해 뒀다. 오미선 대표는 나머지 자료들을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오 대표가 보낸 박스 네 개가 천안 노마만리에 도착했다. 사무실 이사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정리한 자료들이었다. 나는 마치 선물상자를 열 듯 박스를 열어 안에 든 자료들을 꺼내 보았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었으니 영화포스터 수집으로 유명한 양해남 선생의 포스터 자료집 ‘영화의 얼굴’(사계절, 2019)이었다.

양해남 선생은 30여년간 2400점의 포스터를 모았고, 그 중 자신의 컬렉션을 대표할 수 있는 248점을 추려 한국영화탄생 100주년이 되던 2019년 이를 정리해 책으로 냈다. 이 책에는 양 선생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포스터인 1950년작 ‘놀부와 흥부’(이경선 연출)에서부터 1989년작 ‘서울무지개’(김호선 연출)까지 한국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영화들의 포스터가 실려 있다. 이뿐만 아니라 포스터와 관련해 그 시대의 영화산업, 인쇄산업 그리고 영화의 줄거리와 영화, 영화인 등 한국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다보니 이 책은 단순히 영화 포스터를 수록한 도록에 머물지 않고 한국영화 50년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서적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책을 훑어보다보니 양 선생이 수집한 1950년대 영화 포스터들의 경우 대부분이 유일본이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포스터 수천장이 제작돼 전국 방방곡곡에 붙었을 텐데 지금은 불과 한두장 정도만 남아있다는 말이 서글펐다. 한때는 곳곳의 벽에 붙어 있을 정도로 흔해서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 이후엔 더 이상 게시될 이유가 없어서 폐기됐기에 지금 양 선생이 수집한 포스터들은 이제 한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귀한 존재로 남았다.

책을 수집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얼굴’은 펼쳐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내가 가진 고서들이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책이듯, 옛날 영화의 포스터는 나이 지긋한 누군가에게는 젊은 시절의 한때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리게 만들 잊었던 추억임을 잘 알기에 그럴 것이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