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문화일반

[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잊힌 731부대의 만행이 되살아나기까지

등록 2023-05-20 06:00:00   최종수정 2023-05-20 06:42:05
  • 크게
  • 작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세균무기 준비 사용죄로 기소된 전 일본 군무자 사건 공판재료(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3.04.2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천안의 노마만리에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누는 영화토론 모임 ‘탐닉’이 열린다. 현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제작연도순으로 보는 ‘봉준호 전작 전’이 열리고 있는데, 지난 12일에는 2013년 작 ‘설국열차’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보고 난 회원들의 첫인상은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구나’ 하는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이었다. 개봉 당시에는 영화의 배경인 2030년이라는 숫자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그 시간이 먼 미래가 아니라는 것에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을 빼앗긴 경험이 있어서인지 영화 속 ‘빙하시대’가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공포가 느껴졌다고도 했다.

이날 모임에는 나보다 몇살 많은 부부가 처음 자리를 함께 했다. 천안시청에서 발간하는 ‘천안사랑’의 기자로 일하는 분들인데, 지난주 노마만리를 취재하러 왔다가 영화모임을 하는 것을 알고 모임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참석했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많았다. ‘설국열차’에 꼬리 칸의 아이 중 2명을 뽑아 앞칸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있다. 분노한 아이의 아버지가 신발을 벗어 메이슨 총리에게 던졌고 결국 저항의 대가로 한쪽 팔을 기차 밖에 노출시켜 꽁꽁 얼게 만드는 형벌을 받는다. 이 장면에서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마루타’에서 실험용 인간의 팔을 급속 냉동시켜 막대기로 두들겨 부러트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마 봉준호 감독도 그 영화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 같다. 이날 처음 모임을 같이한 부부도 ‘마루타’에서 묘사된 그 충격적인 장면을 기억했다. 지금껏 그 장면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1990년 소개된 영화 ‘마루타’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제강점기 말기 세균전을 준비했던 관동군 731부대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출간된 정현종의 장편소설 ‘마루타’를 통해서였다. 베스트셀러 소설 ‘마루타’의 대중적 인기로 731부대를 다룬 1988년 작 홍콩영화 ‘흑태양 731’이 수입돼 1990년 ‘마루타’라는 이름으로 상영됐고, 다음 해인 1991년에는 MBC 특별기획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731부대의 만행을 드라마로 보여줬다. 50%가 넘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인기 드라마였기에 731부대가 저지른 만행은 보통 이 드라마를 통해 기억됐던 것 같다.

731부대의 범죄행위는 역사적 기록보다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와 같은 일종의 창작품을 통해 알려졌다. 주된 이유는 일제가 패망한 후 범죄행위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남기지 않기 위해 관련 시설과 문서들을 폐기했고, 마루타라 불린 실험용 죄수들까지 모조리 학살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731부대장이던 이시이 시로 등 주요 범죄행위자들이 전후 전범 처리 과정에서 제대로 단죄되지 않아 생체실험과 관련한 모종의 음모를 상상케 했던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731부대에 관한 전범재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소장한 책 중 1950년 모스크바 외국문서적출판사에서 출간된 ‘세균무기 준비 사용죄로 기소된 전 일본 군무자 사건 공판재료’가 있다. 1949년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전범재판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1950년 출간된 러시아판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분단체제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는 큰 관심사가 되지 못했고, 또 다른 전쟁에 몰입하는 사이 최악의 전쟁범죄는 잊혔다. 731부대 전범재판 기록을 훑어보며 어떠한 정의로운 전쟁도 최악의 평화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지난 100여년의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프린트
  • 리플
위클리뉴시스 정기구독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