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고려 땐 마신 와인, 조선에선 왜?
불경을 중심으로 시작된 신라의 목판 인쇄술은 신라 말기에는 시문 등 일반 서적의 간행으로 확대됐고, 고려시대가 되자 사찰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팔만대장경경은 고려시대 목판인쇄술의 백미이다. 고려 왕자 출신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송나라, 거란, 일본까지 섭렵하며 4000여권의 불경 주석서를 수집해 1090년 그 목록을 출판했다. 1200년대 초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현재는 1377년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 남아있다. 1455년경 나온 쿠텐베르그의 금속 활자본보다 68년 먼저이다. 하지만 거란, 여진, 몽골의 침입 등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 그동안 간행된 귀중한 서적들이 소실됐다. 하지만 이렇게 축적된 인쇄 역량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출판과 기록문화가 발전한다. 고려시대 와인과 포도에 관한 기록과 문학작품도 대부분 조선시대에 간행됐다. 그런데 와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고려 말에 비해 조선에서는 환경 상 와인을 접할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와인을 마신 대부분의 기록은 고려 말 이야기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와인의 양조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 초부터 많은 서적에 인용되고 있다. 와인을 마신 기록은 없는데 양조법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은 중국 왕조의 변천과정 및 중국 와인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풀린다. 중국 본토에 처음 와인과 양조용 포도나무(비니페라)가 들어온 건 한 무제 때다. 하지만 와인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확산된 시기는 640년 당 태종이 신장지역을 정벌한 후 마유(馬乳)포도를 들여온 이후다(‘예문유취’(藝文類聚), 624). 송나라 시대 이전에는 포도만 사용하는 정통 양조법으로 와인을 만들거나 서역에서 수입했다. 전한 말 편찬된 가장 오래된 본초학 의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언급된 와인은 정통 양조법으로 만든 와인이다. 이후 대부분 본초학 책에는 와인 혹은 와인의 양조법이 나온다. 포도주를 약용으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신수본초’(身修本草, 659)와 ‘식료본초’(食療本草, 701~705), 북송 초기인 1082년 간행된 ‘증류본초’(證類本草)에 언급된 와인도 정통 와인이다. 증류본초는 “포도주와 벌꿀은 누룩이 없어도 저절로 술이 된다”(而葡萄,蜜等, 獨不用麯)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 1596)에는 정통 와인 양조법과 함께 누룩과 쌀밥을 넣는 양조법이 등장한다. 포도주를 증류하여 브랜디를 만드는 양조법도 들어 있다. 포도는 비니페라 종이 아닌 산포도나 건포도도 가능하다고 했다. 유럽연합(EU) 와인 위원회(CEEV)는 와인을 '분쇄여부와 관계없이 오직 신선한 포도 또는 포도즙만을 사용하고, 전체 혹은 부분적 알코올 발효를 통해 얻은 결과물'(EU1308/2018)로 정의한다(편의상 ‘정통 와인’). 이에 따르면 누룩과 쌀을 넣은 포도주는 엄격히 말해 와인이 아니다. 포도에 누룩과 쌀밥을 사용하는 양조법은 북송 말기 주굉(朱肱, 1050~1125)이 지은 ‘북산주경’(北山酒經)에 처음 나온다. 금나라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이 지은 ‘포도주부’(蒲桃酒賦)는 ‘안읍(安邑)에는 포도가 많지만 포도만 넣어 포도주를 만들었던 옛 사람들의 양조법을 잊어버리고 쌀을 넣어 술을 만든 탓에 엿처럼 달지 않다’고 했다. 포도를 ‘蒲桃’로 표기했다. 쌀 누룩 포도주 양조법이 처음 나타난 시기를 위 문제 시절 혹은 당나라 후기로 보는 중국 학자도 있지만, 여러 기록으로 보아 북송 중기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같은 산서성 지역이라 안읍과 가까운 태원(太原)은 당나라 시절 유명한 와인 산지였다. 북송 초 문장가 소동파(1037~1101)의 시를 보면, 그는 매년 태원 현감이 와인을 보내 주는 것을 고마워했다. 와인의 주산지인 서역의 통제권을 잃고 시대적으로 황주가 유행했던 탓에 정통 와인의 양조법이 점차 사라진 것이다. 원나라가 들어서자 유럽과 중앙아시아로부터 조공으로 들어온 정통 와인이 대량으로 보급됐고 중국 내 생산도 다시 늘었다. 하지만 1368년 원나라가 망한 후 명나라 시절에는 와인의 생산이 다시 위축됐고, 민간에서는 구하기 쉬운 산포도를 넣은 쌀 누룩법이 확산했다. 충렬왕 이후 고려는 원나라에서 수입한 정통 와인의 시대였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한 시기에는 정통 와인의 수입이 끊어진다. 대신 조선에도 명나라에서 이미 보편화된 쌀 누룩 양조법이 들어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포도주 양조법은 1433년(세종15) 유효통(兪孝通)이 편찬한 종합 의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나온다. 포도 분말과 누룩, 찹쌀밥을 넣고 발효시킨 쌀 누룩 양조법이다. 그 후 여러 의서, 요리서, 농업서적에 등장하는 포도주 양조법은 모두 쌀 누룩법이다. 1540년경 김유(金綏, 1491~1555)가 지은 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 본초강목을 참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동의보감’(1613)에 나오는 레시피도 비슷하다. 동의보감에서는 포도즙을 사용했다. “익은 포도를 비벼서 낸 즙을 찹쌀밥과 하얀 누룩에 섞어 빚으면 저절로 술이 된다. 맛도 매우 좋다. 산포도도 사용할 수 있다.” 160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누룩과 쌀밥 대신 껍질 벗긴 산포도와 얼음설탕을 항아리에 넣고 밑술을 첨가해 발효시키는 양조법이 등장했다(‘본조식감’(本朝食鑑, 1695)). 당시 일본에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와인과 설탕이 들어와 있었다. 쌀밥과 누룩 혹은 밑술과 설탕을 추가한 이유는 비니페라 종이 아닌 산포도만으로는 술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기본적으로 마실 와인이 없었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