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이것은 마포가 아니다···박장년, 실재와 환영의 경계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헝겊을 말아 묶어 놓은듯 하지만, 분명 그림이다. 얼핏 보면 깜박 속을수 있는 그림, 전문용어로 '트롱프뢰유'라고 한다. 프랑스어로 '눈속임'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눈을 속이는 그림'은 실제와 착각하게 한다.2차원 평면이면서 3차원 입체물인척 한다. 화가 박장년(1938~2009)도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그는 캔버스가 아닌 '마포'(삼베)를 사용해 눈속임을 극대화했다. 마포로 만든 캔버스 표면에 동일한 색조의 물감으로 섬세한 음영만을 그려 넣어 바탕 자체에서 마포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스며 나온 것과 같은 눈속임 효과를 자아냈다. 색채의 절제와 극사실주의적 묘사를 통해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의 회화적 철학은 간단했다. '캔버스 표면을 표면 그 자체로 되돌려준다'는 고집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마포 시리즈'는 2009년 세상을 뜨기전까지 계속됐다. 마포위에 마포를 그리는 일을 반복해 나온 그림은 그야말로 '마포' 그 자체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박 화백은 왜 마포에 꽂혔던 것일까. 장남인 건축가 박윤석씨는 어릴 적 아버지가 부지런히 마포를 씌우고 잡아당기고 호치키스를 박던 모습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1974년부터 1년여 사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수의를 접하시면서 '마포' 영감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1938년 전남 고흥 태생의 박장년 화백은 1960년대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수학하며, 서양의 엥포르멜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평론가 오광수에 따르면 주변의 앵포르멜 작가들과 달리 박장년의 회화에는 “격렬한 제스처 대신 무겁게 침잠하는 심연과 같은 기운이 지배하고 있었다” 박화백은 동시대 동료 작가들이 주로 단색 추상화를 제작하던 1970년대 당시, 마포의 구김과 주름, 짜임 등을 재현하며 극사실화에 빠졌는데, 단색화의 경향을 띠면서도 세밀한 형상 묘사를 도입한 그의 시도는 '참신하다'는 평을 받았다.
마포에 그려진 극사실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단색확 열풍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미술관에서 주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인기작뿐만 아니라 전 시기 작품을 제대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성곡미술관이 박화백 타계이후 첫 회고전을 기획했다. 작품을 소장한 카이스갤러리와 유가족의 협력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박장년 1963-2009-실재와 환영의 경계에서'전을 타이틀로 회화 설치 영상등 약 90여점을 전시한다. 엥포르멜의 경향을 엿볼 수 있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00년대 후반 작고하기 직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볼수 있다. '단색화' 창시자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박장년은 마포 위에 단색으로 마포를 그리는 동어반복적인 작업을 해왔다. 단색화와 극사실주의 회화의 경계에 있는 작가로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가"라고 재평가했다.
박장년 '마포 그림'은 40여년이 지난후에도 생생하게 부활해 실재와 환영의 관계에 대해 다시 묻고 있다. 왜 화가들은 평생을 투자해 실제처럼 똑같이 그리려고 했을까. 잘 그린 그림이란 무엇인가. '실물을 꼭 닮게 그려봤자 어디까지나 실물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인데', 실물인 척 하는 그림은 발길을 잡고 머물게 한다. 40년이 묵은 그림이지만 보는 순간 '와우!'가 터지는 '와우 이펙트(wow effect)' 효과가 강렬하다. 가짜임을 알고도 몇번을 가까이 들여다보게 하는 이 그림은 그런면에서 여전히 참신하다. 전시는 5월13일까지.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