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소설가의 영화와 홍상수의 실화 사이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다 제쳐두고 일단 마지막 장면으로 가자. 홍상수 감독의 새 흑백영화 '소설가의 영화'는 제목처럼 극 중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만든 영화의 한 대목으로 추측되는 영상을 보여주며 끝난다. 준희가 만든 이 단편영화엔 얼마 전 그가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캐스팅한 배우 길수(김민희)가 출연했다. 길수는 완성된 영화를 보러 작은 극장에 왔고, 홀로 영화를 본다. 흑백영상이었다가 갑작스럽게 컬러영상으로 전환하는 이 영화(영화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지만) 속에서 길수는 중년 여성과 함께 꽃을 따 부케 비슷한 무언가를 만든다. 그는 부케 같은 그것을 들고 걸어가며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을 흥얼거린다. 이윽고 화면이 다시 흑백영상으로 전환돼 본 영화로 넘어오고, 영화를 다 본 길수가 극장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기로 한 사람들은 없고 길수는 홀로 극장에 남겨진다. 그렇게 '소설가의 영화'는 끝난다. 관객은 이때 (홍상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관객이라면) 홍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관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준희가 만든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추측되는 저 영상은 실제로는 홍 감독이 휴대폰으로 아무렇게나 찍은 무언가이며, 이때 화면 속에 담긴 건 영화 속 배우 길수가 아니라 홍 감독의 연인 배우 김민희라고 거의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게다가 부케와 결혼행진곡이라니). 그러나 홍 감독은 준희가 만든 영화 속에서 길수가 연기한 인물이 김민희일리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다시 흑백화면의 본 영화로 돌아가 길수를 비춘다. 그런데 이 장면도 이상하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 있는 길수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또 한 번 김민희를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잘나갔던 배우 길수는 더이상 주류 영화계에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기다려주는 이 한 명 없이 홀로 선 길수의 모습은 김민희의 현실 같다. 그리고 그런 길수를 연기하는 김민희를, 홍 감독이 영화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관객은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설가의 영화'는 명백히 홍상수와 김민희에 관한 영화다. 홍 감독이 전작들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반복·차이·우연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이를 통해 관객이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보다 먼저 얘기해야 할 건 분명 홍상수와 김민희,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사실이 '소설가의 영화'에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생활을 관객은 (최소한 국내에서만큼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때 홍 감독의 영화를 두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홍 감독은 자신을 둘러싼 그 사실들을 영화라는 프레임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테면 배우 김민희가 반영된 캐릭터인 길수가 있고, 길수가 출연한 극 중 영화에서 길수는 마치 실제 김민희인 듯하다. 홍상수는 그런 김민희와 함께, 그리고 길수와 함께, 길수가 연기한 김민희와 함께, 현실과 영화의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기로 작정한 것만 같다. 홍 감독은 '소설가의 영화'가 자신과 자신의 연인에 관한 영화라는 걸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준희가 어느 지방 도시에 갔다가 몇몇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는 과정을 담은 1부와 준희가 영화를 완성해서 상영하는 이야기를 담은 2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 준희가 만나는 이들은 마치 홍 감독의 전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 같다. 그리고 이들은 홍 감독과 김민희의 과거가 일부분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다소 도식적으로 분류해보자면, 시인 '만수'(기주봉)는 지질한 보통 남자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홍 감독의 과거인 것 같고, 젊은데다가 맑은 기운이 있는 '현우'(박미소)는 김민희의 과거인 듯하다. 도망가듯 지방에 내려간 '세원'(서영화)은 국내에선 두문불출하는 홍 감독과 김민희를, 함께 오래 살았다는 부부 '효진'(권해효)과 '양주'(조윤희)는 김민희와 연인이 되기 전 홍 감독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소설가 준희와 배우 길수는 결국 현재 어느 지점에 있는 듯한 홍상수이고, 김민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소설가의 영화'는 준희가 길수와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이건 홍 감독이 김민희와 영화를 만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상상해볼 수도 있다. 1부 마지막 대목에선 준희와 준희가 우연히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술을 마신다(효진과 양주는 당연히 이 자리에 없다). 준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만들 영화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일종의 선언을 하고, 그 전까지 준희의 영화에 출연하기를 망설였던 길수는 선뜻 함께하겠다고 답한다. 그렇게 소설가가 만들 예정인 그 영화는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건 마치 홍 감독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부터 시작된 김민희와 공동 작업의 시작을 상기하게 한다. 이렇듯 '소설가의 영화'는 최근 홍 감독이 내놓은 영화 중 유독 홍상수와 김민희가 두드러진다. 이제 관객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소설가의 영화'를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영화가 아닐 이유가 없다. 영화의 소재가 홍상수와 김민희일 뿐이다. 만약 '소설가의 영화'가 준희가 영화를 완성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홍상수와 김민희의 이야기가 담긴 그저 사적인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준희가 만든 영화의 한 대목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이 도약은 관객을 현실인지 아닌지 모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 놓는 명백한 영화적 체험을 통해 달성된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가 만들고 김민희가 출연한 영화 속에 준희(홍상수)가 만들고 길수(김민희)가 출연하는 영화가 있고, 그 영화(로 추측되는) 한 대목이 홍상수가 찍고 김민희가 나오는 영상이 있는 영화다. 관객은 이 오묘한 순환을 볼 때만큼은 홍상수와 김민희가 현실에 존재하는지, 영화 속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어쩌면 홍 감독이 김민희와 함께 그 모호한 공간에 있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준희의 영화 속에서 길수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말한다. "이 꽃 예쁘다…이거 흑백이에요? 아쉽다." 그런데 그 영상은 흑백이었다가 컬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하는 건 길수가 연기하는 캐릭터인가, 아니면 길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김민희인가. 알 수 없다. 그렇게 현실은 영화가 되고, 영화는 현실이 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