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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일본인이 본 식민도시 경성의 밤, ‘취한 배’

등록 2022-07-1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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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취한 배 (사진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제공) 2022.07.11. photo@newsis.con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한때 대학에서 한국영화사 수업을 진행하던 때, 꽃이 피고 단풍이 들 무렵이면 학생들과 함께 서울 시내 답사를 했다. 학생들 스스로 직접 역사적 현장을 발로 밟아보고 계절의 변화도 느끼면서 시대의 감각을 피부로 확인해 보자는 의도로 진행한 야외 수업이었다.

벚꽃이 필 무렵에는 학생들과 함께 남산 주변을 걸었다. 남산한옥마을에서 시작해 충무로 일대와 남산 둘레길을 둘러보고 명동 쪽으로 내려와 한국은행 앞을 거쳐 서울광장 쪽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남산 둘레길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이 아름다워 학생들이 봄을 만끽하기 적당했다.

사실 이 코스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서울의 남촌에 해당하는 곳으로 식민지배의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자 식민지적 근대의 상징 같은 곳을 걷는다는 의미도 있다. 한국은행 앞은 일제강점기 ‘선은전 광장’으로 불리던 곳으로, 조선은행·중앙우체국·조선저축은행·미쓰코시 백화점으로 둘러싸인 번화가이자 일본 상권의 중심인 혼마치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이곳의 상징은 선은전 광장 로터리 중심에 위치한 분수대인데, 지금은 로터리 기능이 사라졌지만 분수대는 신세계백화점 앞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분수대를 보면 다나카 히데미쓰가 쓴 ‘취한 배’(1948)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남산 부근에서 술을 먹고 만취한 주인공 고키치와 그의 친구 노리다케는 예전 학생 시절처럼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며 선은전 광장까지 내려온다. 심지어 노리다케는 분수대에 들어가 똥을 눈다. 그 장면을 그 곳을 지나던 조선인 여성 작가 노천심이 바라보고 있다. 술에 취해 있던 고키치는 어느 좌담회에서 본적이 있는 작가 노천심을 발견하고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1942년 11월 일본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회의에 참석한 조선과 만주, 중국에서 온 작가들이 경성을 거쳐 자신들이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경성을 들러 며칠 머물게 된다.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행사가 계획된다. ‘취한 배’는 경성에서의 행사 기간을 배경으로, 일본의 중요 인사가 보낸 화평 밀서가 있다는 첩보와 그 밀서를 노리는 사람들 간의 암투를 그린 필름느와르 풍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48년은 일제가 패전 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의 문화정책에 맞춰 할리우드 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와 상영됐고, 할리우드에서는 필름느와르 영화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상황인지라 ‘취한 배’도 필름느와르 영화들의 영향이 일정부분 확인된다.

필름느와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같은 도시의 어둠과 불안, 알 수 없는 음모와 공포 같은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치명적인 여성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남성을 위험으로 몰고 가는 이를 ‘팜므 파탈’이라 부른다. ‘취한 배’에는 조선인 작가 노천심이 바로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 노천심은 우리에게 ‘사슴’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시인 노천명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일찍이 한평생 친일문학을 연구한 임종국 선생은 이 책을 ‘취한들의 배’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출간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이 책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에서 유은경 선생의 번역으로 1999년 다시 출간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조선문인협회 소속의 작가 다나카 히데미쓰의 눈으로 본 전쟁기 경성의 작가·예술가들의 광기 어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조선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술에 취해 저지른 일탈적인 행동 후에 남는 후회의 기억이 마치 숙취처럼 남아 있는 것은 불행한 시대가 남긴 교훈 같은 것이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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