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고려 사람들도 술을 좋아했다
역사에 기록된 우리 술 이야기
[서울=뉴시스]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후한의 채옹(蔡邕, 133~192)이 엮은 ‘금조’(琴操)다. 고조선 시대에 지어진 한국 최고(最古)의 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배경 설명에 나온다. 시에는 나오지 않지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한 남자가 술병을 쥐고 강을 건너려 다 빠져 죽은 것을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지었다는 내용이다. 서진(西晉)의 최표(崔豹)가 지은 ‘고금주’(古今注)에도 인용됐다. 우리의 술 문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세기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의 위서 권30에 있는 ‘오환선비동이전’이다. 우리나라 관련 부분만 떼어 흔히 ‘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으로 부른다. 신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당나라는 물론 8~9세기 일본의 문헌에도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술이 기록돼 있지만, 정작 12세기가 되기까지 우리 술을 기록한 우리나라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 전에 편찬된 우리나라 역사 기록이 잦은 전란을 거치며 모두 소실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1145년(고려 인종23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도 ‘한서’나 ‘삼국지’ 등 중국 문헌과 함께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화랑세기’(花郞世記) 등 우리나라 고서 수십 편을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단 한권도 없다. 우리 술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오는 우리나라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이다. 대무신왕 11년조에 ‘지주’(旨酒)란 표현이 처음 우리 문헌에 등장한다. ‘미온’(美醞) ‘료례’(醪醴) 등 술 관련 용어가 등장하는 삼국유사는 한참 후인 1281년에 편찬됐다. 지주와 미온은 좋은 술, 료례는 막걸리와 단술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우리 술에 대한 기록도 12세기 들어 중국의 기록에 먼저 나타난다. 북송의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고려의 풍속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다. 고려 술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술을 담는 용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고려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며, 찹쌀이 귀하여 멥쌀에 누룩을 섞어 빚었는데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고 했다. 또 왕이 마시는 청주인 법주(法酒)를 양온(良醞)이라 하고 좌고(左庫)에 보관한다고 적었다. 서민들은 빛깔이 진하고 투박한 술을 마시는데, 잔치 때 마시는 술은 맛이 달고 별로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다. 이로 보아 고려의 상류층은 도수가 높고 여과한 청주를 마시고, 서민들은 갓 발효한 막걸리를 주로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술과 단술의 양조를 담당하던 부서는 ‘양온서’(良醞署)라 불렀는데, 한때 ‘장례서’(掌醴署) 혹은 ‘사온서’(司醞署)로 개칭하기도 했다(고려사). 또 사찰에서 술을 빚어 시중에 판매하는 것이 성행해 1010년(현종 1년)과 1021년(현종 12년) 이를 금지했지만, 사찰들은 금령을 어기고 양조를 계속했다(고려사절요, 권3). 삼국사기 이후에 처음 보이는 우리나라의 술 관련 문헌은 임춘(林春, 1149~ 1197(?))이 지은 ‘국순전’(麴醇傳)이다. 1222년 간행한 ‘서하집’(西河集)에 들어있다. 술을 의인화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이다. ‘국’(麴)은 누룩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아닌 위진남북조시대(220~589)의 중국이다. 주인공 국순은 감숙성 농서(隴西)가 고향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완적(阮籍, 210~263), 유영(劉怜, 221~300) 등은 그 시대 애주가의 상징인 ‘죽림칠현’이다. 유영은 술을 칭송한 ‘주덕송’(酒德頌)으로도 유명하다. 1241년 이규보(李奎報, 1169~1241)는 국순전의 영향을 받아 ‘국선생전’(麴先生傳)이 들어있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지었다. 이규보는 술과 시, 거문고를 좋아해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라 불렀다. 동명왕편에서는 ‘고삼국사’를 참조해, 주몽신화에 나오는 술 이야기를 소개했다. 국선생전의 시대적 배경과 등장인물도 국순전과 비슷하다. 시와 술을 사랑한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유영은 주인공 국성(麴聖)의 친구로 나온다. 국성의 고향은 역시 감숙성에 있는 주천(酒泉)이다. 농서와 주천이 모두 중국 와인의 기원인 옛 양주(凉州)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고대 중국에서는 술을 ‘배중물’(杯中物) ‘금파’(金波) ‘곡얼’(麯糵) ‘춘’(春)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했다. 두 소설도 ‘평원독우’(平原督郵) ‘청주종사’(靑州從事) 등 의인화된 술의 별칭이 나온다. 이는 남북조시대 유의경(劉義慶, 403~444)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술해(術解)’에 처음 나오는 말로, 각각 나쁜 술과 좋은 술을 비유한다. 동국이상국집에도 수십가지의 각종 술 이름이 등장한다. 고려시대에 편찬한 술에 대한 우리나라의 문헌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당나라 이전의 위진남북조시대가 배경이거나 혹은 당시에 편찬된 문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제민요술’(齊民要術, 533~544)도 북위의 가사협이 지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종합 농서로서 농사법 및 누룩과 장 등 발효식품의 레시피가 들어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삼국시대 말기와 고려 초에 이르는 기간 중국에선 당나라가 망하고 오대십국과 송나라가 등장하는 등 어지러운 국제정세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송나라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고려의 지식인들이 참조한 중국 문헌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당나라를 통해 국내에 들어와 있었거나 혹은 1071년 고려가 북송과 관계를 회복한 후 1127년 금나라에게 망하기 전까지의 기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자료를 우리나라에서 구하는 것은 아직 제한적이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고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안정되면서 고려시대의 술 문화를 기록한 우리의 문헌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와인에 대한 비교적 세세한 기록도 있다. 술에 대한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고려말 이후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