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 '최면의 힘' 여전히 새롭다…김창열 작고 3주기[박현주 아트클럽]
갤러리현대, '김창열 영롱함을 넘어서' 24일 개막1970년~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38점 전시방탄소년단 RM 소장품도 나와 주목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물방울인가 아닌가. 아무리 가까이 들여다봐도 믿기지 않는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한 점 물감의 흔적 뿐이다. 캔버스 화면에서 마술을 부린듯한 물방울 그림은 기묘하고 경이롭고 여전히 매혹적이다. 생전 물방울을 그렸던 화가 김창열(1929~2021)화백은 무엇을 그리려 했던 것일까.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전(Illusion)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입니다.” 그도 어느날 환상(Illusion)속에서 '물방울'을 선택했다.
1969년 뉴욕에서 파리로 예술의 터전을 옮겨 간 김창열은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생활했다. 1971년 어느 날 아침, 재활용 하기 위해 물을 뿌려둔 캔버스에서 반짝이는 물방울. 그 찰나의 순간은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었다. 그가 물방울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麻袋)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造形的)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여진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質感)은 어떤 생명력(生命力)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 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感度)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 졌어.”(『공간』,1976년 6월호) 1976년 현대화랑 개인전을 앞두고 11년 만에 고국에 온 김창열은 미술평론가 이일과 동료 작가 박서보와 나눈 대담이다. 1972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그의 물방울이 처음 소개된 이후 '김창열의 물방울은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며 떠들썩했다. '물방울 화가'의 서막을 연 순간이었다. 물방울은 환상이다. 1970년대 나타나는 물방울들은 대체로 실제 물방울이 캔버스 위에 맺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초기의 이 물방울들은 실제처럼 영롱하게 그 빛을 발하며, 중력을 거스른 채 존재감을 드러내며 맺혀 있다. 이 시기의 물방울들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김창열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구축됐다. 물방울에 매료된 김창열은 물방울에 미쳤다. 마(麻)천, 모래, 신문, 나뭇잎, 그리고 한자 등 실제 위에 물방울을 그려 놓으며 실재와 가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중성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물방울도 응답했다. 중력과 시간을 거스르며 영롱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맺혀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며, 물방울이 갖는 다양한 물리적인 형상으로 변화한다. 1979년작 '물방울'에서는 물방울들이 화면 한가득 맺혀 있다. 그중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화면 위에 맺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언뜻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는 '기이한 물방울'의 모습이다.
'물방울 CSH27-1'(1979)에서는 물방울의 점도가 달라진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같은 물방울이지만 끈적하면서 밀도 있는 느낌을 보이는 이 물방울들은 작가가 다양한 물방울의 성질들을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한지 작품들에서는 동양의 전통 사상을 작품에 녹여내려 했다. 붓으로 천자문을 여러 번 겹쳐 쓰면서 빼곡한 글씨와 한지 특유의 질감이 어우러져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어릴 적 먹으로 글씨 연습을 하듯 천자문을 가득히 적는 내용적 측면과 더불어, 재료적 측면에서도 해외 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와중에도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으려는 한국화가 김창열의 의지다. 평생 물방울만 그렸지만, 같은 물방울은 없다. 70년 후반과 80년 이후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한 화면에서 물방울들의 점도와 흐르는 속도를 서로 다르게 하거나, 혹은 중력을 다르게 적용하거나, 아니면 다양한 재질 위에서의 물방울들을 통해 사실인 듯 보이나 철저하게 조형화된 화면을 보여 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물방울을 연구하면서 이를 더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지지체를 찾는 실험에 몰두했다. 글자를 비롯한 다양한 표면과 물방울이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연출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가졌던 수많은 고민과 치열함, 조형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을 엿볼 수 있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리거나, 혹은 지워내기도 한다. 글자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글자 위에 색을 칠한 후 글자 부분만 뜯어내는 기법을 사용하거나, 글자 부분만 비워놓고 색을 칠하는 등 다양한 기법 실험을 관찰할 수 있다. '회귀 DRA97009'(1997)에서는 물방울 옆에 먹으로 글자가 지워져 있는데, 이는 마치 물방울의 그림자처럼 기능하며 제3의 공간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평면이 아닌 표면 위에 물방울들을 놓고, 표면과 글자, 글자와 물방울과의 관계를 탐구하며 다차원적인 화면 구성을 시도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다. ‘수행’, ‘성찰’, ‘회귀’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영혼에 대한 ‘레퀴엠’ 등 서사를 품고 마술같은 미술로 명상과 치유의 공간으로 나아갔다. 김창열 화백 작고 3주기를 맞아 '물방울 그림'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대는 김창열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를 열고 마대 위 물방울이 처음 등장하는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창열 화백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8점을 선보인다. 이 작품 중에는 방탄소년단 RM이 소장 한 작품도 나와 있다. RM은 윤형근, 유형국과 달리 생전의 김 화백과 만나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구매한 작품을 어느 작품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며 이번 전시 섭외에 선뜻 내놓았다는 후문이다. 갤러리현대와 김창열 화백의 인연은 사후에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1976년 현대화랑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 중인 김창열 화백의 초대전을 개최하며, 그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했다. 이후 김 화백의 마지막 전시가 된 'The Path'(2020)까지 열 네 번의 전시를 함께하며 반세기 동안 소중한 인연을 이어 왔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창열 화백의 열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에 이어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대를 이어 조명하고 있는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고 3주기 전시가 아니다"며 "추상화의 시대가 저물고 이젠 구상화의 시대가 오고 있는 흐름 속에서 전 세계에서도 볼 수 없는 물방울화, 초현실 구상화의 면모를 재조명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창열 화백은 1971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물방울을 선택한 이후, 물방울(Illusion)과 물방울이 존재하는 표면(Real)의 관계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평생에 걸쳐 재검토해 왔다. 전시 제목 '영롱함을 넘어서'는 처음 물방울을 대면했던 그 순간의 영롱함을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작가의 조형적 의지의 표상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1970년대 물방울을 또다시 뛰어넘어야 했던 50년간의 미적 여정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수행에 가까운 물방울을 통한 예술의 본질, 즉 일루전(Illusion)에 대한 도전과 이를 통해 당도하고자 했던 조형적 아름다움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는 6월9일까지 열린다.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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