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도 증오도 아닌···김종갑 ‘혐오, 감정의 정치학’
한국 사회의 혐오를 감정 자체로서 바라보고 접근한 책이 ‘혐오, 감정의 정치학’이다. 혐오는 분노와 다르다. 저자는 논리와 정의를 표출하는 분노와 ‘말을 잃은’ 혐오를 구분한다. 거듭되는 좌절로 분노에 신물이 나 생각도 하기 싫은 순간에 혐오가 온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사회를 혐오로 물들게 한 연원으로 지목되는 것이 보기다. 혐오는 증오와도 비교된다. 행동을 두고 판단하는 ‘미움’이 격화된 증오와 달리 혐오는 존재 자체에 근거하는 ‘싫음’이 격화된 것이다. 혐오는 다분히 심미적인 감정이 된다. “혐오라는 감정의 근원, 그리고 그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혐오의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다. 입 안에 고인 침은 삼킬 수 있지만 컵에 뱉은 침은 삼킬 수 없듯이, 혐오는 내가 나로부터 분리한 속성을 나와 다르다고 구분지은 타자에게 부여하며 느끼는 감정이다. 되기 싫고 나쁘다고 여겨지는 속성들을 타자에게 부여한 뒤 타자를 약하며 악한 것이라고 혐오함으로써, 나는 선하고 무결하며 우등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 혐오는 주체가 스스로 선함과 우월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감정이기에,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혐오의 대상은 다양하다. 소수자나 약자 혐오가 두드러지는 탓에 다른 인간에 대한 혐오만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혐오의 시작에는 자기 혐오가 있다. 자기 혐오는 특히 분석 대상이다. 내가 되고 싶은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현재의 나를 혐오한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도 활약상이 그려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구토’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를 예로 든다. 로렌스는 외부의 충격에 상처를 입는 연약한 육신을 혐오했다. 사르트르는 정신적인 자유를 구속하는 육체를 혐오했다. 둘 다 내면과 정신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둘러싼 겉껍질을 혐오했다. 결국 자기혐오는 자기애의 일종으로 나타난다. 모든 주체는 되기 싫은 것을 혐오함으로써 한층 우월한 정체성을 취득해 자아를 달랜다. 혐오는 직관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된다. ‘탐욕’을 악덕으로 여긴 찰스 디킨스는 스크루지 영감이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의 퀼프 등 탐욕스런 인물을 생김새부터 고약하게 묘사했다. ‘배신’을 최고 악덕으로 취급한 단테는 브루투스를 지옥의 최하층부에 적치해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현대의 혐오는 더욱 음험하게 나타난다.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한 혐의를 받은 미식축구 스타 O J 심슨은 ‘타임’지의 표지에 명암 대비를 과도하게 준 머그샷으로 실렸다. 딱딱하게 굳고 어두운 ‘범죄자스러운’ 인상으로 표현됐다. 조카에게 숙청당한 장성택은 다리가 부러져 절뚝대며 최후를 맞았다. “혐오 감정은 혐오해야 할 상대의 열등함이나 악함을 더 잘 드러나도록 조작함으로써 심화되지만, 그 과정에서 수용자들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선천적으로 싫어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동성애나 이슬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사실은 생래적인 게 아니듯이 말이다.” 혐오에 관한 책의 논의는 현 시점 한국 사회를 말하는 가장 강렬한 키워드 ‘여성 혐오’로 귀결된다. 서양의 ‘미소지니(misogyny)’가 번역되며 함께 수입된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서구의 전통적인 여성 혐오를 먼저 소개한다. 남성 중심적으로 발전해온 서양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이성적 활동을 방해하는 종족 번식의 노예이자 이성을 흐리는 살덩이로 묘사돼 왔다. 대표적인 여성 혐오자인 쇼펜하우어나 오토 바이닝거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양상이다. 이들이 여성을 존재 자체를 이유로 혐오했다면,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햄릿은 어머니의 신속하고도 그릇된 재혼이라는 ‘행동’을 원인으로 여성 일반을 혐오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는 이들의 계보를 잇는 것인가. “사회적 특성에 비춰볼 때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가 원론적인 여성 혐오와 거리가 있다”고 선을 긋는다. “전통적으로 혐오는 나의 우월함을 다지는 강자의 감정이다. 하지만 요즘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내보이는 감정은 열패감으로 분석할 수 있다. 때문에 ‘미소지니’가 번역되며 붙여진 이름 ‘여성 혐오’가 사실은 ‘혐오’라는 감정에 대한 오해에서 잘못 만들어진 것이며, 또 이때 ‘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실제 나타난 미소지니 현상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제시되는 모든 혐오들은 삶이 팍팍한 사회 구성원들이 우월한 것, 다수인 것, 기득권을 지닌 것을 표방하기 위해 만들어낸 감정이라고 분석한다. 약자와 소수자를 같은 인간의 지위에서 깎아내려 동물화하는 감정인 혐오가 만연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인들이 현재 우월하려고 애쓴다는, 곧 열패감에 젖어 있다는 반증이라고 지적한다. “혐오를 또 다른 혐오가 아니라 다른 방향의 에너지로 전복해야만 한다. 그것은 동물화했던 타자를 재인간화하는 사랑일 수도 있고, 폭력에 분개하여 정의로써 저항하는 분노의 감정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싫거나 미운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증상적으로 내뱉는 혐오라는 일차원적인 감정의 재생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성의 의지로 혐오의 굴레로부터 탈피해야만 한다.” 김종갑(건국대 영어영문학 교수) 지음, 204쪽, 8000원, 은행나무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