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앞장선 조각가 최충웅 '전설'…김종영미술관 초대전
최충웅 조각가는 1939년 충북 청주출신으로 해방과 함께 우리 말과 글로 교육받은 ‘교육 해방둥이’다. 195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 1963년에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4·19혁명에 앞장선 한국 첫 번째 민주화 세대이다. 이같은 프로필을 소개하는 건 해방 후 격랑의 시대를 살며 황무지인 한국미술의 장래를 짊어진 세대로 작가의 행보가 곧 '한국 현대미술 조각사'의 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 작가로 데뷔했다. 1990년 첫 번째 개인전을 연 이후 총 5번의 개인전을 선보였다. 서울대학교에서 은사 김종영 조각가의 만남은 그의 예술관에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68년 '현대공간회' 창립회원으로 참가한 후 20여 년간의 활동은 그의 작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힌다. 이번 전시 제목 '우리 눈으로 조각하다'는 그의 작업 화두였다.
최충웅의 작업은 여느 조각가와 마찬가지로 인체 작업에서 출발했다. 1963년 대학 졸업 후 1974년 처음으로 스티로폼을 소재로 작업하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조각계에서 스티로폼은 너무나 생소한 재료였다. “사람들이 편견이 있어서 어떻게 스티로폼을 재료로 선택했냐며 웃고 그랬어.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거든. 매년 작업을 해내니까 다들 깜짝 놀랐지.” 최충웅은 이런 재료를 가지고 조각가로서 평생 “현대미술이 어떻게 우리나라의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로 우리 것이 단절되지 않도록 과거와 지금을 연결하려고 부단히 고민하며 작업해 왔다"고 밝혔다. 이러한 화두로 작업에 전념하던 최충웅은 지속해서 여인상을 만들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인물 만드는 작가들이 가족을 자주 만들더라고. 명색이 남편이 조각가인데 집사람이 서운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닮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집사람을 만들기 시작했지. 그게 가족이란 작품이야. 그리고 '오월 여자'라는 작업은 5·18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건데 그 내용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았지. 딸들이 많잖아. 가족도 좀 만들고 싶더라고.” 조각가 최충웅 작업의 모든 것은 60년 전에 겪은 4·19 항쟁의 바탕이 된다. 최종태 김종영미술관 명예관장은 최충웅 작가를 "정의의 광장을 달렸던 최충웅을 잊을 수가 없다"고 전했다 " "광화문 광장으로 청와대 앞으로 구름같이 달려 나갔던 젊은 학생들의 장한 기개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총탄에 맞아 숨졌다.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그 정신으로 추호의 양보 없이 살아간 최충웅이라는 한 인간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최충웅의 예술은 거기가 바탕이고 거기에서 나왔다. 불의와 부정을 눈감지 못하는 젊은 기개, 최충웅의 일생은 그 젊음으로 불태웠다. 세상은 별로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 잠시도 외면할 수 없었든 현실, 우리의 현실이 달라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감격이 사그러들 수가 없는 어찌 보면 그는 영원히 불쌍한 청년이었다." 생전 최충웅 조각가는 시류와는 거리를 두고 생전에 작품 발표를 극도로 절제했다.1991년 서울산업대학교 조형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200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후학 지도에도 헌신했다. 2002년 뜻하지 않은 발병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 지난해 가을 유명을 달리했다.
이번 전시의 주된 전시는 1전시실의 청동 작품들이다. 스티로폼으로 제작하여 주물을 뜬 작품들로 '전설'과 '작품'이라는 제목의 연작이다. 장승을 모티브로한 '전설' 연작의 최초 작품은 지금은 망실 되어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1974년 '현대공간회' 정기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제2전시실에는 최충웅의 다양한 유품이 전시됐다. 전국의 장승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찍어 정리한 앨범과 슬라이드이다. 제3전시실에는 '여인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대표작들을 드로잉 작품과 함께 전시했다. 29일까지. 관람은 무료.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