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 양색시'...홀로남은 70대 노인의 고독사 [①기지촌여성, 그들은 지금…]
지난달 교통사고 숨진 고 엄숙자 할머니16살 평택 안정리 기지촌에 팔려가미군에 '성(性)' 팔던 '기지촌 여성'으로 한 평생미군 사이서 낳은 아들 해외로 입양연극 '숙자이야기' 출연 등 '기지촌' 실상 세상에 알린 주인공
[수원=뉴시스]박상욱 이병희 기자 =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들의 수난은 주변의 다른 약소국 못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공물(貢物 )형식으로 다녀온 처녀들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종군 위안부들이 있었다. 6·25 한국전쟁 위안부와 또 기지촌 여성들은 6·25 전쟁과 함께 희생당한 여성들의 모습이자, 한 시대의 아픔이다. 특히 현재 나이가 70대 후반에서 80대에 이르는 기지촌 여성 출신 할머니들의 경우 이른바 '양공주, 양색시'로 불리면서 지금까지도 사회의 관심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과 미군 주둔에 따라 국가에서도 일정 부분 묵시적으로 관리해 온 집단이다. 2020년 5월 전국 최초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고,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일부 승소 판결 등으로 다시금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뉴시스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한 단면이자 희생양으로 불리는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과 국가지원 필요성,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재조명 등에 관해 5차례에 걸쳐 진단해 본다. <편집자 주> ①'양공주, 양색시'...고독 택한 70대 노인의 쓸쓸한 죽음 ②'나는 위안부입니다...'같이 도망갈래? 따라 들어선 기지촌 ③전국 최대 규모 기지촌 경기도…사회적 무관심, 생활고 등 이중고 ④원고 엄숙자 외 122명, 피고 대한민국 ⑤현대사의 비극이자 희생양…국가와 경기도 공식 사과 필요 "또 한 명이 떠났어. 젊었을 때는 달러를 벌었으니까 '용기 있게 살라', '자신 있게 살라' 해놓고 지금은 나이 먹고 몸 아픈데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지. 그렇게 외롭게 하나둘씩 떠나는 거야."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햇살사회복지회에서 만난 조은자(72) 할머니는 최근 곁을 떠난 고 엄숙자 할머니 생각으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마스코트인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쾌활하게 웃는 엄 할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16살 때 가정부를 시켜준다던 이웃을 따라나섰다가 평택 안정리 기지촌에 팔 려간 고 엄 할머니. 미군에게 '성(性)'을 팔던 '기지촌 여성'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엄 할머니는 미군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해외로 입양 보냈다. 훗날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고, 찾아갈까 싶었지만 그만뒀다. '이제 와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라는 생각에 '고독'을 택한 것이다. 엄 할머니는 찬바람이 부는 지난 1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차디찬 바닥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평생을 '양공주', '양색시'라는 꼬리표를 달고 고독하게 살았던 그는 마지막까지도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용기를 내자'…혼자가 아닌 삶 엄 할머니는 모두가 숨겨왔던 과거 '기지촌'의 실상을 용기 내 세상에 알린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 2000년대 초부터 기지촌 여성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햇살사회복지회' 화요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미국 시카고와 애틀란타에서 외국인 앞에 당당히 나서 기자회견도 했다. 또 기지촌여성지원법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 경기도 조례 제정을 위한 토론회 등에서도 목소리를 냈다. '기지촌'을 주제로 한 연극 '숙자이야기'에 직접 출연해 핍박 속에서 버텨온 세월을 몸소 표현하기도 했다. 나아가 기지촌인권연대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증인으로도 나섰다. 따가운 세간의 시선이 두려워 '난 그런 적 없다', '난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외면해 왔던 조 할머니를 설득해 햇살사회복지회에 초대한 것도 엄 할머니였다. 아래위층에 살면서 안면을 익힌 그들은 혼자사는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술 한잔 기울이다가 기지촌에서 산전수전 겪었던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됐다. '용기를 내자'는 엄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선 지 벌써 7년이 됐다. 평생을 죄인으로 살았던 삶, '괄시받고 살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서로 위안을 삼는 벗이 됐다. 조 할머니는 "다리도 안 좋은 사람이 저녁에 거길 왜 가. 너무 속상해. 너무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르겠어"라며 엄 할머니 생각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지난해 조 할머니는 6·25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에게 나오던 연금을 모은 전 재산인 1억 원 가량의 돈을 기지촌 여성평화박물관 '일곱집매'를 짓는 데 써달라고 햇살사회복지회에 기부했다. 그는 "이게 다 엄숙자할머니 덕분이지"라고 말했다. 조 할머니는 "나이 먹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죽고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 돈이 의미 있게 쓰였으면 했어요. 죽고 나면 남은 돈도 다 여기 기부할 거예요. 은혜 갚을 길은 이 길뿐이에요"라고도 덧붙였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엄숙자씨는 용기있는 인권활동가였다. 기지촌을 알리기 위해 그동안 발 벗고 나섰던 분이다. 지난해 12월 평화의소녀상 10돌 기념행사에서 외침이 마지막이 됐다. '숙자이야기'라는 연극이 나왔듯이 엄숙자 할머니의 삶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우리에게 의미있게 남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