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정신나간 자기확신의 신화…'킹 리차드'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킹 리차드'(감독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는 언뜻 보면 밑바닥에서 시작해 최정상에 오른 스포츠 스타를 그린 평범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게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빈민가 컴튼에서 자란 흑인 자매 비너스·세리나 윌리엄스가 백인의 스포츠로 여겨지는 테니스로 스포츠계 살아 있는 전설이 되는 성공 신화를 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 조금 이상하다. 제목부터 두 사람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의 이름 '리차드'를 따온데다가 영화는 비너스가 성인 무대에 데뷔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게다가 비너스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세리나의 데뷔는 이 작품에서 전혀 볼 수 없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킹 리차드'는 자매를 위대한 스포츠 스타로 키워낸 아버지의 헌신과 열정에 더 초점을 맞춘 얘기일 거라고. 흔히 골프 전설 박세리, 피겨 여왕 김연아, 월드클래스 축구 스타 손흥민의 성공을 말할 때 그들의 부모에 관한 얘기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킹 리차드'는 성공의 밑바탕이 돼 준 조력자에 관한 영화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 감독은 리차드 윌리엄스를 딸들의 성공을 위해 삶을 바친 헌신적인 아버지로 그리는 것과 동시에 자식들을 어떻게든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만의 '계획'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왕'으로 그려내고 있다. '킹 리차드'는 이처럼 다층적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열정을 가진 아버지와 비상한 재능을 가진 두 딸, 그리고 이들의 야망이 뒤엉키며 시작된 위대한 여정의 출발을 그린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지 짚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선을 넘은 듯한 성공에 대한 집착, 아버지로서 자식의 보호자가 돼줘야 한다는 과도한 강박을 빼먹지 않고 담아낸다. 백인 스포츠에 뛰어든 흑인 자매의 이야기로 인종차별 문제를 짚어내기도 하고, 전 세계 스포츠계 아이콘이 될 두 여자 아이를 내세우면서 페미니즘을 간접적으로 건드리기도 한다. 144분에 달하는 '킹 리차드'의 러닝타임은 이런 갖가지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뻔한 스포츠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그린 감독의 이 욕심은 '킹 리차드'의 장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단점이기도 하다.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영화이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챙겨가지 못하는 작품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엔 스포츠 스타 이야기를 담은 영화 특유의 승리의 쾌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생 역전 스토리의 저릿한 감동도 다소 약한 편이다. 그렇다고 리차드가 딸들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한 선택들의 명과 암을 균형 있게 대비시키지도 못한다. 이 영화가 건드리고 있는 인종·성(性) 문제에 관한 메시지 또한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단점을 상쇄하는 건 윌 스미스의 연기다. 스미스는 리차드 윌리엄스의 내면과 외면을 온전히 체화하는 열연을 펼친다. 외적인 부분에서 말투는 물론이고 구부정한 어깨와 특유의 느릿한 걸음걸이 등을 완벽하게 재연해냈으며, 리차드의 삶에 대한 철학이나 딸들을 교육하는 방식 그리고 가족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아버지의 속내를 과장 없는 감정 연기로 절절하게 표현해낸다. '킹 리차드' 이전 메이저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한 번도 받지 못 한 스미스는 어쩌면 과소평가 받은 배우였을지도 모른다. 이에 한풀이 하듯 오는 27일 열릴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스미스가 오스카를 들어올릴 가능성이 가장 커보인다. '킹 리차드'는 리차드가 딸들에게 테니스를 시키는 이유에 관해 말하는 걸로 시작된다. 그는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한 경기를 뛰고 자신의 연봉보다 많은 돈을 버는 걸 보고 딸 둘을 더 낳았다고 얘기한다. 말하자면 그는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성공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매의 성공을 믿지 않을 때도(한 명도 아니고 둘 씩이나) 리차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플랜'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 플랜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중이라고 믿을 뿐이다. '킹 리차드'는 이 정신나간 듯한 자기 확신이 어쩌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는 것 같다.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행복을 찾아서'(2006)에서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네게 넌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해도 신경쓰지마. 그게 나라고 해도 말이야."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