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생의 한가운데'에서 만든 '재춘언니'
[서울=뉴시스] 1980~90년대까지 책을 판매하는 외판원들이 전집류나 백과사전과 같은 고가의 책을 집집마다 방문해 팔았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던 우리 집에는 월부책장수가 종종 찾아왔다. 부모님은 그가 꺼내 펼쳐 놓은 카탈로그를 보고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을 골라 사주셨다. 그렇게 새롭게 책장 한편을 차지하게 된 책은 한동안 우리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손수 만든 책장에는 우리 삼남매의 책 외에도 월부책장수에게 구입한, 어른들이 읽을 법한 책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중에는 1979년 예서각에서 전5권으로 발행한 ‘루이제 린저 대표 문학전집’도 있었다. 책갑에 들어 있던 이 책은 책등이 팥죽색과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본문의 편집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었고 글씨도 작았으며 내용도 아이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표지에 금박으로 새긴 작자 루이제 린저라는 낯선 이름과 1권의 제목 ‘생의 한가운데’라는 진중한 제목은 유독 머릿속에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지난달 이수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의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 갔다.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의 제목과 제작진들의 이름이 담긴 오프닝 타이틀이 나왔는데 흥미롭게도 제작사 이름이 ‘생의 한가운데’였다. 어려서 책장에 꽂혀 있던 ‘루이제 린저 대표 문학전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수정 감독은 영화사의 이름을 왜 루이제 린저의 대표작 ‘생의 한가운데’라 지었는지 궁금해졌다. 2020년 부산영화제에서 비프 메세나 상을 수상한 ‘재춘언니’는 경영합리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13년간 이어진 복직 투쟁의 시간을 담고 있다. 4464일이라는 오랜 투쟁 시간 동안 이들 해고 노동자들은 밴드를 조직해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햄릿’과 같은 연극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단식 농성 중에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두툼한 철학 책을 읽어 냈다. 영화의 주인공인 임재춘은 틈틈이 글을 쓰는데,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쓴 글을 직접 낭송한다. 카메라는 문화투쟁의 일환으로 무대에 선 해고 노동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투쟁의 일상을 병치해 보여준다. 흑백의 담담한 화면과 그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음악, 여기에 자신이 쓴 글을 담담하게 읽어 내는 임재춘의 목소리는 13년이라는 시간이 어쩌면 이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성찰의 시간이었음을 말해준다. 어느새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일상이 되었고 그 일상이 된 투쟁의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인식하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감독이 ‘생의 한가운데’라는 작품을 제작사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복직 투쟁이 3년 정도 되었을 때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한 이 감독은 이들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을 10년이나 함께 했다. 그 과정에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발견했으며 동시에 22년 만에 ‘깔깔깔 희망버스’(2012)로 영화 연출을 재개한 스스로가 이전보다 훨씬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자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생의 한가운데’라는 제작사의 이름은 누구의 아내 혹은 누의 어머니라는 이름 대신 영화감독 이수정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데뷔 30년이 넘는 경력의 여성감독의 의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