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원계홍' 잊힐 뻔했다...두 컬렉터가 없었다면
성곡미술관,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김태섭×윤영주 소장가 추진...100점 공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아무리 숨어도 저절로 알려진다. 성곡미술관에서 선보인 '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낭중지추(囊中之錐)'의 뜻을 떠올리게 한다. 1990년 공간화랑에서 열린 유작전 이후 33년 만에 빛을 본 전시로 미술애호가들의 역할을 새삼 각인 시킨다. 이번 전시에 나온 100여 점은 두 소장가, 김태섭 전 장신대 학장과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 덕분이다. "'작품은 팔지 말고 잘 갖고 있는 게 좋겠다'는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말씀으로 견뎠죠.” 김태섭 전 학장은 1989년 부동산 주인 소개로 간 원 화백 부암동 집에서 그림과 만났다. 들어본 적 없는 화가였지만 작품에 눈이 멀었고, 당시 아파트 두 채 가격에 작품 200점을 인수했다. 지금도 원계홍 작가의 집에서 살고 있는 그는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방 두 칸에 그림방을 만들었다.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앞 집에 세를 얻어 공부방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윤영주 회장은 1984년 크라운제과 대표 시절 처음 30년 전 인사동에서 열린 유작전에서 처음 본 그림에 빠져들었다. 이후 장안평 고미술상가에서 엘피판처럼 쌓여 있는 그림을 발견했는데 슬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원계홍은 생면부지 두 사람을 연결시켰다. 10년 전 쯤 윤영주 회장이 '원계홍 흔'적을 찾다가 김 전 학장의 글을 발견했고 댓글을 달면서 이어졌다. 100주년 전시를 열자고 흔쾌히 추진한 이번 전시에는 김태섭 씨가 소장한 65점, 윤영주 회장이 소장한 16점을 공개한다.
성곡미술관 이수균 학예실장에 따르면 원계홍은 '외골수 화가'로 불린다. 1940년대에 도쿄로 건너가 주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노쿠마 겐이치로(Inokuma Genichiro)의 사설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등 경제학보다도 그림을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계홍은 귀국한 후에도 아틀리에에서 서구 거장들의 미술 이론을 독학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몰두했다. 주로 정물과 주변 풍경, 서울의 골목길 등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으며, 간간이 인물화와 추상화, 은지화도 제작했다. 그중 원계홍이 1970년대 후반부터 작업한 골목 풍경화들은 개발 전 서울의 모습을 포착한 그림들로, 대담한 구도와 단순명쾌한 필치가 두드러지고 현대인의 우수가 느껴지는 대표작이다. 좀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는 1978년 55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두 번째 개인전, 제3회 '중앙미술대전' 초대 전시를 통해 화단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듯했으나, 1980년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족적은 세상에서 잊혀 사라질 뻔했다. "먼지처럼 흩어질 뻔한 운명을" 잡아준 두 소장가, 김태섭씨와 윤영주씨가 아니었다면...
"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략) 이 화가는 늘 인간에게 절망하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걸면서 아름답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그의 그림은 정신이 병들지 않고 기술이 숙련에 때묻지 않고 소박하며 원시적인 건강함에 빛나고 있었다.” (故 이경성, 「원계홍, 그 우수의 미학」(1984) 中) 전시는 원계홍의 작품 100여 점과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인다. 원계홍의 ‘순수한’ 예술혼과, 그의 예술을 지켜낸 소장가들의 ‘순수한’ 애정을 기억하는 의미를 담았다. 故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오광수 미술평론가, 김현숙 박사의 글로 한국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원계홍의 작품 세계를 재평가한다. 생전 '그림만 보고 살았다'는 화가의 맑은 기쁨이 전해진다. 5월21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