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비우고 버리니 충만하다 '플로우'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상투(常套)가 지겹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소란에 지친 관객에게 라트비아에서 온 애니메이션 영화 '플로우'(3월19일 공개)는 완벽에 가까운 대안이다. 긴츠 질발로디스(Gints Zilbalodis·31) 감독은 관습에 기대지도, 유난을 떠는 법도 없이 담담히 관객을 품는다. 초저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작비 약 370만 달러(약 53억원)가 투입된 이 작품은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처럼 기술적 완성도가 빼어날 수도, 일본에서 탄생한 것들처럼 역동적일 수도 없다. 그러나 '플로우'는 꼭 그래야만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며 절제와 여백의 세계로 관객을 슬쩍 끌어당겨 여기 잠시 머물러 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어떤 관객이라도 이 이끌림을 마다치 못할 것이다. 인간이 내는 소음이 견딜 수 없게 시끄러운 세상에서 이 영화의 고요를 싫어할 순 없으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이 모두 사라진 세상. 갑자기 숲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마도 대홍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 가야 할 것이다. 작은 검정 고양이 한 마리도 그 중 하나. 수위가 계속 높아져 더는 갈 데가 없어진 고양이는 때마침 떠내려가던 배에 올라타기로 하고, 그렇게 앞날을 알 수 없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연히 같은 처치에 놓인 개·카피바라·여우원숭이·뱀잡이수리를 만나 이들과 함께하게 된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동물들의 예기치 못한 모험을 왁자지껄하게 그린 전형적인 스토리 같아 보이지만, '플로우'는 이런 애니메이션이 으레 활용하는 의인화를 최대한 내려놓음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다. 당연히 대사도 없고 표정도 없다. 러닝타임 85분엔 조용히 깔린 음악과 함께 동물과 자연이 내는 소리만 있다.
'플로우'는 비우고 버리는데도 충만하다. 대사가 없어도 맥락이 있고, 표정이 없어도 감정이 있으며, 음악과 음향도 넘치지 않게 스며든다. 더 많은 걸 전시해서 관객 눈을 붙잡아 두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덜 보여주고 더 해석할 수 있게 해서 시선이 갈 수밖에 없게 한다. 인간의 흔적만 남은 폐허와 그곳에 물이 차오른 풍광 역시 최소한으로 남으면서 스크린에 구현되지 않은 것까지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질발로디스 감독은 이 모든 세부사항을 정확하고 효율적인 플롯에 얹혀 하나의 이야기로 도약시킨다. '플로우'가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2'를 넘어 장편애니메이션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독특해서가 아니라 형식에 서사가 녹아들고 서사에 형식이 베어들 때 발생하는 도저히 가려질 수 없는 실감 덕분일 것이다. '플로우'는 어떻게 봐도 무방할 정도로 보는 이들에게 넓은 공간을 열어 놓는다. 그저 동물 캐릭터가 귀여워서 좋아해도 상관 없다. 고양이와 동물 친구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며 성장의 불가결함을 읽어낼 수도 있고, 연대의 불가피함을 절감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 없어 보인다. 다만 환상과 꿈을 넘나드는 이 이야기를 가장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식은 이 영화의 흐름(flow)에 그저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자꾸만 높은 곳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을 상상해보는 것,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올 때 그 마음을 떠올려보는 것,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래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 고래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그 순간 속에서 차오르는 표현할 길 없는 일렁거림을 알아차리는 것 등이다. 그래서 질발로디스 감독은 "의미를 찾지 말고 경험을 받아들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