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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형제복지원 [덕성원을 아십니까①]

등록 2024-02-26 10:00:00   최종수정 2024-03-04 10: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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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초·중·고교생 150~200명 거쳐 간 덕성원

폭언·폭행·노동·성폭행까지…강제 퇴소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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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김민지 기자 = 덕성원피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50)씨가 직접 그린 덕성원 당시 모습. 1952년 부산 동래구 중동(현 해운대구)에 빨간색 지붕을 한 3층짜리 건물 1채가 덕성원의 출발점이다. 이후 이곳은 건물을 추가 건립하며 운영을 해오다 2000년 폐원했다. (사진=안종환씨 제공) 2024.02.26. [email protected]

[부산=뉴시스]김민지 기자 = 1970~80년대 부랑인 선도라는 명목으로 인권 유린을 일삼은 부산 형제복지원.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실상조차 채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형제복지원'이 동시대에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못한 곳, 여전히 악몽 같은 기억을 품고 사는 피해자들. 지옥의 삶, '덕성원'도 그중 하나였다.

◇'보육'의 탈을 쓴 장소, 덕성원

빨간색 지붕을 한 3층짜리 건물 1채. 1952년 부산시 동래구 중동(현 해운대구)에 들어선 이 건물이 덕성원의 출발점이다. 덕성원은 1996년 사회복지법인 덕성원으로 법인 명칭을 변경한 뒤 2000년에 폐원한 아동보호시설이다.

1975년 발표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근거로 복지원 운영과 부랑인 단속, 수용을 했던 형제복지원과 마찬가지로 덕성원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곳은 '덕성보육원'이라는 팻말을 달고 운영을 시작했다. 지킬 보(保)와 기를 육(育)의 한자를 쓰는 '보육(保育)'이 가진 의미처럼 아이들을 지키고 기르는 역할을 해야 함이 마땅한 곳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덕성원은 미취학 아동부터 초·중·고등학생까지 해마다 평균 150~200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부랑아 선도를 목적으로 경찰서나 다른 사회복지시설을 통해 새로운 아이들을 받고, 19세가 넘으면 퇴소시켰다. 덕성원을 거쳐 간 피해 아동 중에서는 부모나 가족이 있는 경우도 꽤 있었다. 즉, 가정 환경이 열악한 상태에서 강제로 잡혀 들어온 아이들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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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김민지 기자 = 부랑인 선도라는 명목하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폭행과 강제 노역 등을 일삼은 덕성원에서 당시 어린아이들이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 덕성원피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50)씨는 사진의 가장 왼쪽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아이가 자신이라고 밝혔다. (사진=안종환씨 제공) 2024.02.26. [email protected]

덕성원을 운영한 건 5명의 자녀를 둔 서씨 일가였다. 아버지인 서모씨가 원장을 맡았고, 그의 아내와 일부 자녀들이 덕성원의 임원을 맡아 관리했다. 이렇듯 서씨 일가는 덕성원을 가족 체제로 운영하며 보조금과 지원금 등을 챙겨 배를 불렸다.

서씨 일가는 덕성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지시를 거역하는 아이들에게는 숱한 구타가 뒤따랐고, 아이들은 얼굴과 팔, 다리 등에 가릴 것 없이 행해지는 폭행을 견뎌내야만 했다.

한 아이는 서씨 일가의 남자 운영진에게 구타를 당하다 머리를 크게 다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각목으로 머리를 수차례 폭행당한 그는 2~3주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생활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덕성원 일가의 지독한 괴롭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한 남자 운영진은 여자아이들을 상대로 성폭행까지 저질렀다. 그는 또 남자아이들에게 자위행위를 강제로 시키며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만행도 저질렀다. 아이들에게 서씨 일가는 그야말로 사람의 탈을 쓴 괴물에 다름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서씨 일가의 강압적인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가는 날이면 하교하자마자 곧장 밭일에 내몰렸다. 서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던 덕성원 인근의 논과 밭뿐만 아니라 불법 점유하고 있던 부지를 다듬고 정리하는 작업은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몫이었다.

서씨 일가는 초등학생에겐 호미를 들리고 잡초를 뽑는 일을 시켰으며, 중학생에겐 삽을, 고등학생에겐 곡괭이를 들려 작업을 시키는 등 나름의 '룰'을 정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룰을 어기면 어김없이 구타가 행해졌다. 아이들은 맞지 않으려면 그저 입을 다문 채 서씨 일가가 지시하는 대로,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나마 학교를 가는 날은 '좋은 날'에 속했다. 방학에는 학교에 가 있을 시간까지 모두 다 노동을 해야 했고 그만큼 구타도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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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김민지 기자 = 폭행과 강제 노역 등을 일삼은 덕성원에서  일과를 그린 덕성원피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50)씨. 위 일과는 학교를 가지 않을 때, 아래 일과는 학교를 갈 때 일과이다. 학교를 가지 않을 때는 하루 중 9시간 상당을 노동에 쏟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진=안종환씨 제공) 2024.02.26. [email protected]

아이들은 오전 6시에 일어난 뒤 예배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일을 해야만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일터로 뛰어가야만 했다.

노동이 면제가 되는 아주 운이 좋은 기간도 있었다. 교인이나 고위직 등 외부 손님이 한 번씩 방문할 때면 며칠간 일을 쉴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자그마한 희망을 품기도 했다. 자신의 삶이 외부 손님에 의해 알려지진 않을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손을 내밀 수 있진 않을지.

하지만, 이는 허망한 꿈에 불과했다. 당시 덕성원을 비롯한 여러 사회복지시설은 물론, 이 시설들이 만든 학교 재단은 한통속이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반 학교로의 입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그저 정해진 학교에 정해진 입학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탈출'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넘보기 힘든 높은 벽이었다. 탈출을 시도했다가 잡혀 들어 온 아이들은 운영진에게 각목, 몽둥이 등으로 심한 매질을 당했다. 이 모습을 본 아이들은 겁에 질려 탈출을 꿈꾸지도 못했다.

아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루빨리 이곳에서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19세가 넘은 아이들은 덕성원에서 강제 퇴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살이 돼 '지옥'을 벗어나는 아이들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십수 년이 흘러 가족을 비롯한 친척의 행방마저 알 길이 없는 상태로 낯선 사회에 던져져야 했기 때문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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