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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는 자책서 벗어나기까지…피싱 피해자의 '지옥 5년'[서민 울리는 민생범죄⑩]

등록 2025-06-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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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 수사관 사칭에 속아 2000만원 건넨 피해자

5년간 민형사 소송 혼자 감당…잡힌 건 전달책뿐

"피해자란 이유로 죄책감 짊어지지 않았으면"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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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서민 울리는 민생범죄]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겹치며 서민들의 생활고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민생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서민의 삶에 고통을 주고 있다.

대출 규제 강화로 금융 소외계층의 자금난이 극심해지면서 불법 사금융 피해가 급증하고 서민의 주거안전을 위협하는 전세사기 피해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 보이스피싱은 최근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진화해 피해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뉴시스는 서민다중피해범죄 피해 실태와 대안을 짚어보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글 싣는 순서 ▲불법사금융 덫(1부) ▲전세사기 늪(2부) ▲보이스피싱 지옥(3부) ▲마약 디스토피아(4부) ▲민생범죄 전문가 진단(5부)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조성하 기자 = [서민 울리는 민생범죄] 보이스피싱 지옥(3부)

"사기를 당하고도 내 잘못 같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해요." (보이스피싱 피해자 박모씨)

앞서 [서민 울리는 민생범죄⑨]에서 소개한 피해자처럼 보이스피싱 범죄는 단순히 '낯선 전화를 받은 실수'에 그치지 않는다. 피싱범은 피해자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고,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금전 손실을 넘어서 수치심과 고립감, 심리적 후유증까지 겪으며 긴 시간 '지옥'과도 같은 후폭풍 속에 머무르게 된다.

박모(29)씨 역시 그중 한명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인 박씨는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라고 전했다.

지난 2018년, 대검찰청 수사관을 사칭한 피싱 조직의 전화를 받은 박씨는 '통장이 범죄에 연루됐을 수 있다'는 말에 겁이 나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박씨는 서울 관악구의 한 산부인과 앞에서 낯선 남성에게 2000여만원을 건넸다.

'검정 재킷에 검정 슬랙스를 입었느냐'는 피싱범의 물음에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한 느낌에 공포심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5년여간의 법적 다툼 끝에 그는 마침내 피해 금액과 일부 이자를 되돌려 받았다. 당시 중간 전달책으로 붙잡힌 20대 남성에게는 법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고, 박씨는 그의 소득을 압류해 분할로 변제를 받았다.

그는 "(해당 남성이) 소득이 생긴 후 압류를 걸어 겨우 돌려받았다. 중간책밖에 걸고넘어질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소송도 혼자, 회복도 혼자…지옥 같은 5년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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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그날 오후 박씨는 경찰서를 찾아가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는 "같은 날 피해자가 저 말고도 3~4명 더 있었다고 경찰이 그러더라"며 "그 전달책이 받은 돈만 1억원이 넘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연락이 끊긴 피싱범은 잡히지 않았고 전달책만이 형사처벌 대상이 됐다. 사회 초년생이던 전달책은 건당 50만원을 받는 '고액 아르바이트'로 이 일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나도 피해자지만 그 사람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며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소송을 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스스로 정보를 찾아 법률구조공단을 통해 민·형사 소송을 모두 진행했다. 형사 판결 이후 민사 소송까지 마무리되기까지 총 5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법적 절차는 물론, 감정적인 싸움도 혼자 견뎌야 했다.

재산이 없던 전달책은 구속 수감됐고 시간이 흘러 출소한 뒤 직장을 구해 소득을 얻기 시작했다. 박씨는 그 소득에 압류를 걸었고 5년이 지나 원금과 일부 이자를 회수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윗선은 잡히지 않았고 중간책에게 화풀이하듯 매달렸던 건 아닐까 찝찝함이 남는다"며 "처음엔 원금만 받으려 했지만, 상담 변호사가 '5년 동안 혼자 버틴 시간도 고려하라'고 조언해줘 결국 이자 일부라도 받았다"고 했다.

◆"나만 조심해선 안 돼요"…어머니도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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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박씨의 사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건 발생 약 6개월 뒤 그의 어머니 역시 '자녀 사칭형' 보이스피싱에 속아 700만원을 이체했다.

당시 박씨를 사칭한 카카오톡 메시지에 어머니는 "거래처에 돈이 들어와야 하는데 입금이 안 된다"는 말에 속아 돈을 보냈고, 이를 알아챈 남동생 덕에 10분 만에 지급정지를 걸어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후로 은행 이체 한도를 최소로 낮췄고, 모든 금융 업무를 직접 은행에 방문해 처리한다고 한다. 문자나 전화가 오면 반드시 자녀에게 먼저 확인한 뒤 움직이는 것이 가족의 새로운 생활 규칙이 됐다.

박씨 역시 피해 이후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같은 피해자들에게 "누구나 다 당할 수 있는 일이고 절대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다. 통장을 쪼개 생계급여를 보호받는 방식으로 압류를 피하고, 자금 인출책은 '전달만 하는 아르바이트'로 위장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피해자의 삶이 무너지는 사이 범죄 조직의 실체를 추적하는 수사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올해 1~3월 경찰에 검거된 보이스피싱 피의자 6218명 가운데 조직 상선급은 70명(1.1%)에 그쳤다. 지난해 전체 검거자 2만1833명 중 상선은 420명에 불과했고 절반 이상이 하부 전달책(3617명)이었다.

범죄는 진화하고 있지만 수사는 여전히 말단 조직에 머무르며 피해 회복이 어려운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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