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 농단]웃음을 앗아간 권력에 웃음으로 저항하다
【서울=뉴시스】김현섭 기자 = 웃기 힘든 시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권력이 우리를 웃기 힘들게 만드는 시절이다.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왕조 국가는 아니지만 권력의 정점이라는 측면에서 과거 한 드라마 속 임금의 대사를 떠올려보자. 2011년 방영됐던 SBS '뿌리깊은 나무' 속 세종(한석규 분)의 일갈이다. "내 책임이다. 내가 죽인 것이야. 이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다!" 함께 한글 창제 작업을 하던 충신이 반대 세력들에 의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고 분노하며 내지른 외침이다. 최고 권력자는 이런 자리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마저 책임을 져야하고(최소한 자신은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변명을 해서도 안 되는 자리이다. 이런 자리에 앉은 통치자가 그 어떤 일보다 준엄히 수행해야 할 국정을 '그냥 아줌마'에게 통째로 맡기다시피 하며 국민을 기만했다. 부모가 장성한 자녀의 일기를 몰래 보려해도 욕을 먹을 수 있는데, 이 '그냥 아줌마'는 일국의 대통령 연설문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쳐가며 나랏일을 떡 주무르듯 했다. 온갖 물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결정한 일이라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결국엔 따라가며 지내왔는데, 알고보니 그 모든 것이 '비선 실세'라 불리는 한 아줌마의 결정, 혹은 손때가 묻어있었음을 알게 됐으니 어떻게 웃음이 나올 수가 있을까. 사기를 당하고 웃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황망함에 넋이 나간 웃음이라면 모를까. 그렇다고 사람이 전혀 안 웃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웃음을 빼앗은 이들에게 웃음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풍자와 해학의 '라이벌전' 전통의 사학 명문 연세대와 고려대는 과거 마스크, 돌멩이, 최루탄 등으로 대변되던 항거의 무기를 풍자와 해학으로 대체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 '연세대학교 대나무숲' 계정에는 '공주전'이 올라왔다. 성이 닭씨인 공주(박근혜 대통령)가 무당 최씨(최순실 아버지 최태민)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세간 사람들이 공주와 최씨 일가의 농간에 대해 알고 경악하는 한편 의로운 선비들 및 사상 최초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공주의 깊은 뜻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병신년(丙申年) 모월 모일 모시에 이 글을 기록하였다.' 능숙한 의고체로 쓰여진 이 글은 수일 간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전통의 라이벌이 '주도권'을 가져가자 고려대는 역시 페이스북 대나무숲 계정에 '박공주 헌정시'를 올려 맞불을 놨다. '근혜가결국 謹惠家潔國 해내시어타 該奈侍於他 나라골이참 儺懶骨以斬 잘도라간다 囐刀喇干多 이정도일준 利精刀一俊 예상모택다 預相謨擇嗲 파곡도파도 把曲度破道 계속나오내 械束那嗚耐…' 한자의 음을 이용한 고전시의 매력을 살리면서 풍자의 날카로움을 더해준 작품이다.
이 학교에는 1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국정종단 파문을 겨냥해 1905년 11월5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며 쓴 글인 '시일야방성대곡'을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서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엎고 국민들을 기만하며 목을 조르는 박근혜 정부는 필시 하야하여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촉구했다. ◇게임에, 방송에…풍자는 끝이 없다 '최순실 게이트'를 비꼬는 게임까지 등장했다. 최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장터인 '구글 플레이'에는 '순실이 닭 키우기'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게이머가 최씨 돼 닭 한 마리를 키우는 방식이다. '물 뿌리기' '연설문 수정' 등을 지시할 수 있다. '순실이 빨리와'는 말(馬)을 탄 최씨 캐릭터가 수갑 등의 장애물을 피해 달리는 내용이다. 이화여대 소속의 승마선수 딸 정유라(20)씨가 입학, 학점 등의 특혜 의혹에 휩싸여 있는 점을 겨냥한 것이다. 이 외에도 대통령의 연설문 단어를 빨리 조합하는 '최순실 게임'도 있다. 이 게임들은 모두 수만 건의 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방송 예능과 드라마도 풍자 바람에 동참했다. MBC '무한도전' 10월29일 방송에서는 '오방색 풍선'이 등장했고, 같은 방송국 사극 '옥중화'에서는 30일에 "이것이 오방낭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면 천지의 기운이 마님을 도울 것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왔다. 불편한 진실은 우울함을 주지만 전 국민의 공분을 몰고 온 국정농단 파문은 '신바람'을 몰고 왔다. 지난 10월25일 부산도시철도 1호선 교대역에는 "보도는 간신, 책임은 대신, 애비는 유신, 정치는 배신, 연설은 순실 접신, 옷 갈아입는 데는 귀신"이라는 쓴소리 대자보가 붙었다. '~신'의 운율을 살린 기발함에 시민들은 암울한 현실에 한숨을 쉬면서도 실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유머와 웃음을 무기로 한 저항을 '탈(脫)영웅주의' '공동체보다 앞선 개인'의 시대로 설명한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시대의 변화를 설명하라면 '영웅주의'에서 '탈영웅주의'로의 이동이라고 본다"며 "예전 영웅주의 시대에는 개인보다 공동체가 앞선다고 생각했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 희생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웅이 됐고 '열사'라고 표현을 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그런데 최근 보면 백남기 농민에게도 열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요즘 열사라는 표현을 쓰면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린다"며 "요즘엔 개인이 공동체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가 생겨서 시위 참여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들을 묶을 수 없다. 대의명분을 위해 의사표현은 하되 일명 '엄숙주의'는 거부하고 내가 헌신까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유머스런 풍자 등의 퍼포먼스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