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살어리랏다③]'현대판 과거' 돈 없으면 엄두도 못 내
【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노량진 고시촌 생활의 가장 큰 관건 중 하나는 돈이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공시족이 월평균 258만1294원을 쓴 것으로 집계됐다. 자세히 살펴보면 ▲학원 수강비 68만2140원 ▲인터넷 강의료 56만4008원 ▲교재비가 28만3290원 ▲독서실비가 26만9216원 ▲식비 40만8947원 ▲교통비 16만6489원 ▲기타 20만7204원이었다. 7·9급 공무원 시험 합격에 평균 2~3년 걸리는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럴 여유가 없다. 부모의 지원이 없다면 고시촌 입성을 결정하기부터 쉽지 않다. 입성한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최종 합격까지 어찌 됐든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공시생이 자기 힘만으로 고시를 준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꾸준한 지원 없이는 고시촌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다. 언제 합격할지 모르는 불안을 떨쳐내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공시생 뒤에는 든든한 '물주'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괜한 소리가 아니다. 또 고시촌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예민할 정도로 절대로 하지 말아야 규율에 스스로 맞춰나가야만 힘든 고시 생활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 견딤이 꼭 필요한 것인지를 기자가 판단하기는 어렵다. □ 라면만 먹고 살아도 부모님께 손 벌려 정은주(28·여)씨는 32개월 차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이다.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 졸업 후 7급 공무원직에 도전했지만, 3차례 고배를 마셨다. 이후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내년에 마지막으로 시험을 본 뒤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고시촌을 떠날 생각이다. 그는 월 46만원짜리 고시텔에서 지낸다. 거의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학원에서 8시간 넘게 강의를 듣는다. 학원비는 3개월 120만원 정도 지출한다. 과목별 단과나 문제풀이 수업이라도 들으면 월 20~30만원이 추가된다. 그간 교재비로도 250만원 넘게 지출했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월 13만원짜리 독서실에서 공부한다. 하루 세끼 식비는 될 수 있으면 5000원을 넘기지 않는다. 점심은 고시식당에서 3900원짜리 한 끼로 해결한다. 원래 한 끼에 4500원이지만, 식권 10장을 한꺼번에 사면 3900원까지 가격을 낮출 수 있어 매번 묶음 단위로 식권을 산다. 밥도 국도 떠다 먹을 수 있는, 그나마 '밥 다운 밥'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한 끼다. 저녁은 고시텔에서 제공하는 라면과 밥, 김치로 때운다. 몇 개월이나 그랬는지 가늠조차 어렵다. 이것마저도 없을 때는 아예 굶거나 과자 같은 간식으로 대충 해결한다. 아침은 가급적 먹지 않는다. 가끔 출출하면 집에서 보내준 유자차와 전날 사 온 빵 하나를 먹는다. 유통기한이 임박해 싸게 살 수 있어 좋았다. "수험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부모님께 죄송해서 집에도 가지 못해요. 몇 년째 집에 손 벌리기가 너무 죄송해 독서실 야간 청소 아르바이트를 잠깐 해봤지만 공부에 방해돼 그만뒀죠."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은 최종 합격까지 추가 비용이 더 든다. 필기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력 검정과 최종 면접 특강을 들어야 한다. 체력 검정 대비 특강 수강료는 2주 기준으로 20만~30만원 선. 면접 준비는 3회(1회당 3시간 강의) 기준으로 15만~50만 원으로 강사진과 학원 규모에 따라 다양하다. 제휴학원을 통하거나 현금결제할 경우 10% 정도 할인받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공시생 혼자 수험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부모 도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부모님 재력이 합격을 좌우한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우스갯소리로 흘러다니는 말이다. 합격할 때까지 부모의 꾸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꼭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 그럴듯하다는 것을 모두 안다. □ '빨리 먹거나 배부르거나'… '컵밥'부터 '고시식당'까지 어느 시험이나 마찬가지다. 공무원 시험도 체력이 필요하다. 잘 먹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노량진 공시생들의 '잘 먹는다'는 개념은 조금 다르다. 저렴한 가격에 빨리 먹을 수 있거나 가격 대비 양이 푸짐한, 이른바 '가성비'가 뛰어나야 한다. 둘 중 하나는 확실해야 한다. 그래야 경쟁이 치열한 고시촌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서다. 사육신 공원 맞은편에 자리 잡은 노량진 고시촌의 명물 컵밥 노점상. 한 그릇 가격은 3000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또 서서 5분 이내에 다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오면 '금상첨화'다. 오래 씹을 필요도 없이 온갖 재료가 뜨거운 철판에 볶아져 흐물흐물해야 한다. 양은 두말할 것도 없이 푸짐하면 된다. 한여름에도 따뜻해야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불문율'이자 '철칙'이다. 컵밥 노점상을 4년째 운영 중인 김모(47)씨는 "한 푼이 아쉬운 공시생들에게 비싸게 판다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그럴싸한 한 끼는 아니지만 공부에 지친 공시생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어 흐뭇하다"고 말했다. 물론 새로 선보인 메뉴 가운데는 3000원이 넘는 것도 있긴 하다. 하지만 공시생용이 아닌 호기심에 고시촌을 찾은 관광객 몫이다. 노량진 고시촌 곳곳에 포진한 핫도그나 토스트, 떡볶이 등 다른 노점상들의 메뉴 가격은 3000원 선이다. 고시학원 오전 수업은 오후 1시께 끝난다. 그때부터 점심시간이다. 수업을 마친 공시생들은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한 곳이 고시식당이다. 2년째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고 있는 이모(28)씨는 "1분 1초가 아까운 공시생들에 한 끼는 빨리 먹을 수 있거나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라며 "대부분 공시생이 집에 손을 벌리는 처지라 가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이성(異性)보다 동성(同性)이 더 위험… 같은 처지라 언제든 똘똘 뭉쳐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노량진 고시촌의 삶은 '달달'하지 않다. 절실한 사람들만 모인다지만 솟아오르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다른 공시생은 사실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경쟁자다. 그래도 사람이 그립다. 혼자라서 외로움을 잘 견디는 것일까. 견디는 것과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작은 공통분모만 있다면, 고시원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한다. 비슷한 나이와 '공무원'이라는 공통 관심사,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 패턴은 '경쟁'이라는 높은 벽도 허문다. 연고도 없고, 다른 듯 닮은 공시생들이지만 한 번 결성된 공동체의 결속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시촌에는 공동체의 내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곳이 얼마든지 있다. 건물 지하마다 있는 당구장과 피시방은 결속력을 다지기에 최적의 장소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환영하는 술집들도 널렸다. 이런 곳에 삼삼오오 모인 공시생들은 공통 관심사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며 결속력을 다진다. 시원스레 욕을 내지를 수 있는 사이까지 도달하면 고시촌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공동체에 속했다는 안도감은 잠시. 늘 불안하다. 독하게 지킨 생활 패턴도 삽시간에 무너진다.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시험에서 떨어진 뒤다. 면목이 없어진다. "독하게 마음먹고 고시촌에 들어와도 외로움은 어쩔 수 없나 봐요. 누가 눈인사라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처음 독한 마음도 무너지고, 그렇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결국 후회밖에 남지 않아요." 4년 동안 경찰 공무원 시험에 계속 낙방한 최모(32)씨는 지난날을 이렇게 후회했다. 그는 노량진 고시촌 사회가 그렇게 폐쇄적이지 않단다. "고시촌에서는 이성보다 동성이 내민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가 어렵습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합격은 이미 물 건너간 것입니다." 그는 말끝마다 이 말을 되풀이했다. 어쩌면 그에게도 숱한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그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