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파면 대통령' 박근혜, 결국 검찰 앞에 서다
이후 18년 동안 서울 신당동의 한 동굴 속에서 은둔 생활을 이어간 이 여성은 40대 중반을 넘어서야 정치에 입문했다. 당 대표로 뽑히는 등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지난 2012년 기어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이 여성의 옆에는 40년 동안 마치 그림자같이 함께 했던 지기(知己)가 있었다. 이 여성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에 휩싸이게 됐다. 결국, 이 여성은 지기로 불거진 사태에 휘말리면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됐고, 불명예를 안은 가운데 검찰 칼날 끝에 올라간 처지가 됐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65) 전 대통령은 지난 3월21일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의 조사를 받기 위해 파면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40년 지기가 일으킨 ‘게이트’ 박 전 대통령의 곁을 40년 동안 지켜온 최순실(61)씨는 지난 2016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다. 최씨는 박 전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국정에 개입해 자신의 이권을 챙겼다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의 당사자다.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는 컸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검찰과 박영수(65·사법연수원 10기) 특별검사팀의 수사를 거쳐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만 해도 30명이 족히 넘었다. 이중에는 안종범(58)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정호성(48)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및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 및 조윤선(51) 전 문체부 장관 등 고위 청와대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 차은택(48) 전 창조경제추진단장 등 사회 각 분야의 소위 ‘최고’들도 포함돼 있었다. 검찰이 칼끝이 향한 것은 최순실 게이트의 몸통이자 핵심인 박 전 대통령이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에게 3월21일 검찰에 출석할 것을 통보했고, 박 전 대통령도 특별히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직권남용, 뇌물수수 등 13개에 달하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을 그간 제기되어온 의혹 전반을 살펴봐야 했기 때문에 당시 법조계에서는 “조사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었다. ◇‘피의자’ 박근혜가 남긴 두 마디 3월21일 박 전 대통령은 남색 코트 차림에 다소 부은 얼굴로 검찰 청사 앞에 나타났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되고, 삼성동 자택에서 칩거한 지 9일 만에 처음으로 국민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취재진 및 검찰 직원, 경호원 등 약 200명이 뒤섞여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새벽부터 혼란스러웠던 검찰 청사는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앞서 박 전 대통령 변호인은 기자들에게 “검찰 출두에 즈음해 박 전 대통령이 입장을 밝힐 것이다. 준비한 메시지가 있다”고 알린 바 있다. 이 때문에 국민 모두의 관심은 그의 입에 쏠렸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입이 열리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실상 파면 뒤 처음으로 국민에게 건넨 메시지는 8초 동안 29자, 별 내용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뚫는다’ 검찰 vs ‘막는다’ 변호인 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는 곳은 서울중앙지검 10층에 위치한 특수1부 검사실 1001호였다. 박 전 대통령의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검찰과 이를 막아야 하는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이 사실상 처음 대면하는 곳이다.
검찰은 베테랑 검사 두 명을 조사에 투입했다. ‘투톱’ 중 선봉은 한웅재(47·28기) 형사8부 부장검사가 맡았다. 최순실 게이트 초기부터 수사를 진행해 와 사건 전반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선봉에 나선 것이다. 두 번째 주자는 검찰 내 현직 특수부 검사들 중 손꼽히는 ‘특수통’ 평가를 받는 이원석(48·27기) 특수1부 부장검사다. 지난 2005년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수사,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등 다양한 수사를 맡으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검찰의 날카롭게 다듬어진 창에 맞서 측근들로 방패를 구축했다. 먼저 검사 출신 유영하(55·24기) 변호사가 검찰에 창에 맞섰다. 사건 초기부터 박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킨 그는 이른바 ‘친박’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다만 지난 2003년 나이트클럽 사장으로부터 두 차례 180만원 상당의 향응을 받은 뒤 검사 옷을 벗은 전력이 있다. 부부장검사 출신 정장현(59·16기) 변호사도 유 변호사와 함께 검찰에 맞섰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검찰 수사에 익숙하므로 먼저 박 전 대통령 조사에 입회했다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만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에서는 검찰 고위 간부 출신 등 거물급 변호사가 없는 것이 약점으로 평가된다. 검찰의 예리한 창을 앞장서서 막아낼 무게감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 내부에서도 이 같은 점을 우려해 대검 중수부장 등을 역임하고 탁월한 수사 역량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은 최재경(55·17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을 영입하려 시도했으나 무산됐다. ◇21시간30분 조사…밤샘 조서 검토 박 전 대통령은 약 21시간30분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로써 역대 검찰 조사를 받았던 전직 대통령 중 최장시간 조사를 받은 전직 대통령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조사 내내 상당히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하는 검사에게 “검사님”이라고 호칭하며 답변을 이어갔고, 대체로 진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또 언성을 높이는 등의 행동도 없었다는 게 검찰 측 설명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점심을 김밥·유부초밥·샌드위치로 채워진 도시락으로, 저녁 식사는 죽으로 해결하면서 조사에 임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3차례 휴식을 가졌을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은 조사가 종료된 이후에도 6시간 이상 본인이 ‘피의자’로 적시된 조서에 대한 검토를 진행했다. 몇 번씩이나 꼼꼼히 조서를 읽어보면서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정 요구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대통령은 다소 피곤한 얼굴로 3월22일 오전 6시55분께 검찰 청사를 나와 곧바로 삼성동 자택으로 향했다. ‘아직도 혐의를 부인하는가’ ‘어떤 점이 송구한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일절 답이 없었다. 300명 안팎의 지지자들과 윤상현·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삼성동 자택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환하게 웃으며 목례를 건넨 뒤 자택으로 들어갔다. 자택 안에 들어가서도 측근들과 논의를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바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딸로, 퍼스트레이디로, 성공한 정치인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삶을 지낸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는 그의 인생과 같이 드라마틱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