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30주년]①뜨거웠던 6월···민주화 목마른 시민들 거리로
"시민이 권력 바꿔" 6월 경험이 촛불로 2007년 국가기념일로···올해로 11차행사 【서울=뉴시스】 변해정 기자 =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시민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타파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쿠데타와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저항을 무수한 인권 유린으로 억압했지만 성난 민심 앞에 끝내 무릎을 꿇었다. 민주화 열망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던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이제 꼭 30년이 됐다. ◇30년 전 그날, 민주주의 꽃 피우다 발단은 1987년 1월14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씨는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이던 선배 박종운씨의 행방을 찾는 치안본부(현 경찰청) 수사관들에 의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경찰은 고문 사실을 숨기려고 그 유명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발표를 내놨다. 박씨의 실제 사인은 5월20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만천하에 드러나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7년간의 임기 말을 맞은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護憲) 조치'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거부하고 정권 유지 뜻을 천명한다. 4·13 호헌 조치는 개헌 논의를 중지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 골자다.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정부 발표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비판 성명이 이어졌다.
규탄대회를 하루 앞둔 6월9일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7월5일 사망)씨가 전두환 정권에 맞서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했다가 시위 진압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려진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6월10일 국본 주최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국본의 방침대로 차량 경적소리가 도로 곳곳에서 울려퍼졌고, 민주주의에 목마른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흰색 손수건을 흔들며 투쟁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이날부터 시작된 시위는 6월29일까지 20여일간 이어졌다. 특히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에는 최대 인파인 150만여명(국본 측 집계)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26일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130만여명이 참석해 무려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됐지만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6월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6월 항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이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시민의 평화적 힘으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대통령을 직접 뽑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노동·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시민단체들을 탄생시키고 활성화시켜 시민 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토대도 마련했다. 또 당시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386세대 중 상당수가 정치에 뛰어들어 정계의 주축으로 자리잡았고, 나머지 주역들도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참여연대 등 시민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다만 시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이뤄놓고도 정작 대선(12월16일)에서 전 대통령의 바통을 이어받은 신군부 세력의 중심 인물 노태우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자신들 손으로 이룬 민주화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는 게 후세의 평가다. 그럼에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6월 항쟁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정부는 2007년부터 6월 항쟁을 기리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올해까지 11년째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