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축제 한채윤 단장 "혐오에 지지 않고 끈질기게 행복하길"
"더운 날씨에도 모두 너무 잘 놀고 가신 것 같아 감사"반대 측 방해가 역설적으로 행사 더 유명하게 만들어홍대·신촌서 광장에 진출하게 된 것도 방해공작 때문"2회 때 총 예산 500만원…올핸 퍼레이드에만 1억원"일하는 원동력은 재미…"매년 규모 커져 일 즐거워""없는 것 같던 성소수자, '존재의 가시화' 이뤄졌다""최근 몇년새 성소수자에 대한 조직적 반대 나타나""정치적 목적 위해 '혐오' 활용…정치인들이 눈치봐""성소수자, 보란듯 행복했으면…'앨라이' 많아지길"
14일 열렸던 퀴어퍼레이드를 마치고 한국퀴어영화제 개막식이 있던 19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한씨를 만났다. ◇"500만원 축제서 1억원 퍼레이드로…출입구 없는 축제 꿈꿔" 퀴어퍼레이드를 마친 소감을 묻자 한씨는 "감동했다"고 했다. "날씨가 더웠잖아요. 누군가가 쓰러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고, 중간에 너무 덥다고, 재미없다고 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퍼레이드 마치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된 사진과 글들을 보니 모두 너무 잘 놀고 가신 것 같아서 감사했어요." 퀴어퍼레이드가 열린 날 서울 한낮 기온은 32도에 달했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르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6만명(주최 측 추산)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현장에서 '놀았다'.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날도 '동성애 반대' 푯말과 관련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반대'측이 자리했다. 광장의 안쪽과 바깥쪽은 경찰의 바리케이드로 갈렸다.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광장에는 반대 세력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따로 출입구도 설치됐다.
반대 측은 "이제 그만 오셨으면 좋겠다"던 한씨는 역설적으로 반대 측이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유명하게 만든 점도 있다고 했다. 2014년 제15회 퀴어퍼레이드 때였다. 신촌 일대를 가로지르던 퍼레이드 일행은 4시간 동안 한발자국을 움직이지 못했다. 반대 측이 통행로를 막은 탓이었다. "사실 그전에는 저희 행사에 많은 분들이 별 관심 없었거든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4시간 동안 대치가 이뤄지면서 언론에 보도가 많이 됐죠. 그분들이 골라 찍은 (집회 참가자들의) '노출 사진'들도 이슈가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고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서울광장에서 퍼레이드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들의 반대 공작에 대응하면서였다. "그전에는 홍대나 신촌에서 축제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 4시간 대치 이후 신촌 상인회에서 반발이 있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야 했죠. 처음엔 혜화역 인근에서 하려고 했는데, 반대 측에서 이를 알고 집회신고를 하는 혜화경찰서 앞에서 노숙을 했어요. 집회신고가 선착순이었거든요." 결국 남은 선택지는 광장이 됐다.
그렇게 2015년부터 광장에서의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규모는 계속해서 커졌다. "제가 처음 축제 조직위에 참여한 게 제2회 때였는데 그때 퍼레이드와 영화제 등을 망라한 축제 총 예산이 500만원이었어요. 올해(19회)는 퍼레이드 기획에만 1억원이 책정됐어요.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기획하는 축제가 1억원 규모라니! 싶을 때가 있죠.(웃음)" 1억원의 퍼레이드를 기획하는 이들은 한씨를 포함해 총 13명이다. 모두 생업이 따로 있고 축제가 열릴 때만 6월부터 1~2개월 모여서 축제를 기획한다고 했다. 한씨도 예외는 아니다. ◇성소수자 인권활동 20년…"반대측 정치세력화, 정치권 나서야" "하는 일이 많아요." 그녀가 생긋 웃어보였다.
활동가로 발을 디딘 건 1997년. 처음부터 '성소수자 활동가가 되리라'고 결심한 건 아니다. 당시 한씨는 고고학자를 꿈꾸며 유학을 준비하다 '때려친', 결혼할 나이가 됐지만 남성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제 막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인, 학부 졸업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고고학자를 꿈꿨고, 대학에서도 고고학을 전공했어요. 유학을 떠나려다 문득 공부에 염증을 느꼈어요. 유학도 안 가기로 했는데 이제는 뭘 해볼까 생각하던 때였죠." 그때 그는 PC통신 하이텔에서 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인 '또 하나의 사랑'을 만났다. 한씨는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회상했다. "난 왜 다를까, 난 왜 인정받지 못할까' 라는 고민을 안고 있었는데 거기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운명이 바뀌었다. "글을 조금 많이 쓰고 열심히 모임에 나온다는 이유"로 해당 모임의 대표시삽(대표자)이 됐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최근 몇년 사이 성소수자에 대한 조직적 반대가 나타난 것이 큰 변화"라고 답했다. 뜻밖이었다. "1990년대가 더 보수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그때는 성소수자라 하면 '뭐야? 변태 아니야?' 정도였지, 요즘처럼 '사회악(惡)'으로 여기진 않았어요. 방송인 홍석천씨가 커밍아웃을 하거나 하리수씨가 나올 때도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보수개신교가 중심이 돼 조직적으로 모여 반대하죠." 그는 그들이 극우세력과 결합하는 등 '정치세력화'됐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이용하고 있다고 봤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활용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정치인들이 그 눈치를 보기 시작했죠." 한씨는 2013년 김한길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의 '차별금지법안' 철회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반(反) 동성애 의견표명'을 예로 들었다. 김 의원은 당시 차별금지법안을 대표발의했다. 법안에는 '성별·장애·학력·학벌'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동성애를 허용한다'며 극렬히 반대했고 결국 해당 법안은 철회 수순을 밟았다.
한씨는 정치세력화된 반대 측과의 싸움은 "꽤나 갈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그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나서야한다고 했다. "이제 성소수자 이슈는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제'가 됐어요.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정치체계와 사회체계를 가진 국가가 될 것인지와 맞닿아 있는 문제에요. 사실 민간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있거든요. 이제는 서울시장이, 국회의원이, 정부가, 더 큰 결단을 내려줘야할 때라고 생각해요." ◇"내 삶에서 바뀔 것이라 기대 안 해…끈질기게 행복할 것" 20대 대학생은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다. 거듭되는 오해가 야속하거나 속상하지는 않을까. 그는 웃으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치감찌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내가 바라고, 꿈꾸는 세상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활동을 통해 어떤 큰 성취를 내 손으로 가지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지치고 힘들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좋아요. 매년 축제 규모가 커지는 걸 보는 재미도 있고, '내년엔 이걸 보완해보자'하면서 기획하는 것도 재밌죠. 책쓰고 강연하는 일도 그래요. 저희(활동가들)끼리도 말해요. '우리가 이걸로 돈을 벌거나 뭐 대단한 걸 하려고 하는 것 아니지 않냐'고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일만 하자고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 '끈질기게 행복하자'고 했다. "지금 사는 게 힘들 수밖에 없지만 내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많은 혐오 발언에 지지않고 내가 나를 지키고 정말 끈질기게, 보란듯이 행복하게 지냈으면 해요." 사회에는 '앨라이(Ally·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그 당사자가 아닌 이가 반대하는 것)'가 돼달라고 부탁했다.
한씨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선택하지 않았듯 활동가의 길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이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20년 넘게 그 길을 끈질기게, 보란듯이 걷고 있다. 오늘도 한씨와 함께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앨라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2016년 8월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시작한 앨라이 선언에는 1000명이 넘게 참여했다. 앨라이 선언은 비온뒤무지개재단 홈페이지(http://rainbowfoundation.co.kr/xe/page_jlVD58)에서 할 수 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