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 강요·고문같은 노동·멸시 73년 버틴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
"악착같이 살아 일본 사과 받는 것이 마지막 소원"
피해자들은 대법원 판결까지 버티면서 고령이 됐지만 "일본의 공식사과를 받을 때까지 악착같이 살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대법원은 이날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를 동원한 미쓰비시중공업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해방이후 판결을 받아내기 까지 73년을 버틴 피해자들의 삶은 하루도 편하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막바지 일본정부는 노동력 조달을 위해 1944년 5월께 광주·전남과 대전·충남지역에서 어린이 300여명을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에 끌고 갔다. 이날 재판정에 선 양금덕(87) 할머니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였다. "일본에 가면 일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에 속아 동급생 등 24명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양 할머니의 꿈은 배에서 내리는 순간 사라졌다.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하루도 편히 쉬지 못했다. 식사 한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가미카제(神風)'라고 쓰여진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채 24시간 감시를 받으며 중노동을 강요 당했다. 동료가 도망을 치다 붙잡혀 모진 매질을 당했던 경험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해방이후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에 다녀 왔다는 이유로 양 할머니는 숨죽이며 지내야 했고 아버지 마저 홧병으로 돌아가시게 했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요양병원에서 투병중인 박해옥(88) 할머니는 당시 전남 순천에서 "일본에 가지 않으면 부모가 경찰에 끌려 갈 수 있다"는 일본군 헌병의 말에 속았다. 유일한 휴식공간이었던 기숙사에 들어가도 감시를 받아야 했고 고문과 다름없는 노동이 매일 이어져 몸이 성한곳이 없었다.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군 위안부로 오인 받아 남편과 불화가 끊이지 않는 등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군수공장에서 중노동을 하던 중 동생의 죽음 소식을 접했지만 보내주지 않아 마지막 가는길 까지 보지 못했다. 당시의 부상으로 인해 현재까지 거동이 불편하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나주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임교사의 권유로 강제징용된 이동련(88) 할머니 역시 현재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하루 종일 군용 비행기의 부속품을 깎는 일 등을 했지만 끼니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월급마저 받지 못한 채 고향에 돌아왔다. 이들의 소원은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73년의 싸움끝에 배상판결을 이끌어 낸 것보다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다. 양 할머니는 "일본이 공식 사과 하기 전까지 절대 눈감을 수 없다. 악착같이 살아서 한을 푸는 그날 부모님 곁으로 갈 생각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