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백석광·정인지 "추남과 미녀, 그 미적 기준을 넘어"
이 여자 배우 역시 만만치 않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시인 백석을 평생 그리워하는 ‘자야’, 제5공화국 시절 언론암흑기를 다룬 연극 ‘보도지침’의 ‘여자’, 힘과 억압에 짓눌인 집안의 비극을 그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첫째 달 ‘앙구스티아스’. 이 연극들로 호평을 받았고 대학로 블루칩 배우들이 됐다. 그래서일까, 백석광(36)과 정인지(35)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했다. 24일부터 5월19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추남, 미녀’ 연습을 하고나서부터는 그러나 달라졌다. 예술의전당 기획, 제작 시리즈 ‘SAC 큐브’의 하나로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브(52)의 소설이 원작이다. 천재 조류학자인 추남 ‘데오다’와 눈부신 외모로 멍청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감내해야 했던 미녀 ‘트레미에르’의 운명적인 만남을 재기발랄하게 그린다. 데오다 역의 백석광은 “설 때 어머니 집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뭐 읽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제목만 말씀 드렸는데 ‘깔깔’ 웃으시는 거예요. 매번 작품을 보러 오실 때마다 무거운 역이라서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즐거우실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두 배우는 합쳐서 20여개의 역을 종횡무진한다. 두 남녀가 성장하는 과정의 주변인물들을 맡아준다. 특별한 두 인물이 서로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더 와 닿는다. 정인지는 “두 주인공이 계속 만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라면 좀 더 상상하기 쉬운 구도였을 텐데, 한번을 만나지 않다 마지막에서 만나는 구도거든요. 그래서 다른 역으로 상대를 먼저 만나는 것이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2014년 김광림 작, 최준호 연출의 2인극 ‘고백’으로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한 백석광은 이번 ‘추남, 미녀’ 형식이 독특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통브 소설의 원작은 샤를 페로의 동화 '고수머리 리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어린시절 굽은 등과 못생긴 외모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받은 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터득한 천재 데오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수함이 있지만 예쁜 얼굴만을 사랑한 남자들에게 ‘멍청한 여자’로 상처받아온 트레미에르가 세상의 미적 기준을 떠나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대신 신체 표현역이 탁월한 그의 기량을 빌려, 일그러진 표정과 동작으로 데모다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럽다. 장애인 극단의 신체 워크숍을 갔을 때 장애인의 과해 보이는 듯한 행동과 말에 ‘자신이 잘못을 했나’라는 착각을 했던 그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편견에 휩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데모다와 자신의 공통점은 갇혀 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데모다는 새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새라는 새의 세상에 갇히게 되거든요. 이성 관계 역시 새를 보는 것으로 차단하고요. 저 역시 연극이라는 세상에 들어와 코가 박혀 있죠. 데모다가 자신이 ‘조류학자’라고 하면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연극배우도 마찬가지에요.”
김남건이 본명인 백석광은 한 때 한국 무용수였다. ‘문제적 인간 연산’, ‘처의 감각’ 등 신체를 활용한 작품에 그가 1순위로 섭외되는 이유다. 연극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으로 신체 표현 없이도 탁월한 감정 연기를 보여준 그지만 “신체와 신체 연기가 개인적으로 너무 중요하다”고 한다. “신체적 표현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단 시즌단원 등을 거치고, 국립현대무용단과 작업하는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그는 소통 창구를 계속 고민 중이다. 유튜브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제목으로 일상툰을 올릴까, 라는 구상도 해봤다고 했다. 정인지는 대학로에 마니아층을 보유한 배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절절한 자야 캐릭터로 지지를 얻었다. 여자 배우임에도 공연을 끝난 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대학로 한편에서 팬들이 줄을 선다. 하지만 작품 출연이 드물어 팬들 사이에서는 아쉬운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추남, 미녀’ 출연 직후 6월에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이 바탕인 뮤지컬 ‘테레즈 라캥’ 초연에도 나온다.
내공이 탄탄한 배우다. 1998년 단편영화, 1999년 청소년 드라마로 데뷔한 그녀는 이제 연극과 뮤지컬을 유연하게 오가는 배우가 됐다. “방송으로 시작해서 무대를 꿈 꾸지 못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연극을 하고, 뮤지컬을 하면서 좋은 멤버들을 만났죠.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인정해준 분들을 만난 거예요.” 적응력이 뛰어난 데오다, 공감의 힘을 아는 트레미에르는 이처럼 백석광, 정인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배우로서 자존감을 키운 두 사람이, 마지막에 서로를 발견하는 데오다와 트레미에르처럼 서로을 알아보고 2인극으로 호흡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리듬감 있는 구성의 이대웅 연출, 대중성 있는 호흡을 자랑하는 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재창작을 맡았다. 국내외 통틀어 이 소설이 연극으로 옮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