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만 앙상한 손을 금박 장식한 이유는?...안창홍의 변신
1세대 민중미술작가로 유명...초대형 부조-마스크등 신작 전시2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화가의 심장'전 개막...25점 공개
작품 제목은 '화가의 손'과 '화가의 심장'이다. 두 작품 모두 높이 3m 가로 길이 2.2m 크기에 달한다. "제목 속 ‘화가’는 나 자신임과 동시에 굴곡진 세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을 대변하는 존재다. " 1세대 민중미술 작가로 알려진 안창홍(66)화백이 회화에서 입체작가로 변신했다. 2일 서울 삼청로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막한 안창홍 개인전 '화가의 심장'전은 2016년 이후 집중적으로 발표해온 조각 작품, 그 중에서도 신작을 대거 선보였다. 초대형 부조 신작과 마스크와 더불어 회화 소품까지 약 25점을 걸었다. 2015년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개인전 이후 4년 만에 서울에서 여는 전시다.
안창홍은 익명의 개인에게 투영된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인간의 소외를 노골적이고 날카롭게 이야기해왔다. 산업화 사회에서 와해된 가족사를 다룬 '가족사진'연작(1979~80)과, 눈을 감은 인물 사진 위에 그림을 덧그려 역사 속 개인의 비극을 다룬 '49인의 명상'(2004), 2009년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건강한 소시민들의 누드를 그린 '베드 카우치'(2009) 연작 등 굵직한 회화 연작들로 '리얼리즘 민중미술작가'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이 평면 장르를 이탈한 건 2016년부터다. 회화에서 입체분야로 확장, 눈이 가려지거나 퀭하게 뚫린 거대한 얼굴 마스크 조각들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개인전은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굴레를, 황금빛의 세 가지 단계로 보여준다. '이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아픔을 동반한다’(안창홍) 가시덤블속 '화가의 심장'처럼 삶의 가치가 고통과 아픔에 기반하며, 나아가 이 고통과 아픔이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음을 비유적으로 제시한다. 전시장 한 켠에는 이 심장만을 환조로 확대한 '화가의 심장 2'가 매달려있다. 안창홍 자신의 심장이자 동료 화가들의 심장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조각 작품들로 구성된 지하층과는 달리, 2층 전시장에서는 대형 마스크 2점과 익명의 얼굴들이 그려진 작은 캔버스 작품 16점이 전시됐다. 2018년에 시작된 회화 연작 '이름도 없는…'에는 몰개성화된 얼굴들이 거친 붓터치로 그려져 있다. 작가에 의하면 이 표정 없는 인물들은 “단지 이름만 없는 이들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묻혀버린 익명의 인물들” 이다. 그는 특징이 제거된 인물들의 얼굴에 제주 4.3사태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역사의 현장에서 희생당해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슬픈 현실을 투영시켰다. 같은 공간에 걸린 2점의 '마스크-눈 먼 자들'연작은 눈동자가 없거나 붕대로 눈을 가린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부조리한 현실 속에 눈은 뜨고 있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상기시킨다. 안창홍의 작품들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부패한 자본주의, 적자생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과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같은 주제의식과 1980년대 ‘현실과 발언’ 활동 이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안창홍을 민중미술 작가로 기억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예술이 ‘현실주의’나 ‘삶의 미술’에 가깝다"고 말한다. 안창홍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제도적인 미술 교육을 거부하고 화가로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1970년대 중반 '위험한 놀이'연작을 시작으로 '가족사진' '봄날은 간다', '사이보그' 연작 등을 발표함으로써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1989년 카뉴 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09년 이인성 미술상에 이어 2013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이번 전시는 뼈만 앙상한 '화가의 손'이 눈길을 끈다. 어떻게 탄생했을까? "어느 날 쓰레기통에 백골의 상태로 폐기된 화가의 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물감통과 작품을 제작하다 버린 조화의 꽃잎, 끝이 부러져 미련없이 통 속으로 집어 던진 나이프와 닳아 사용할 수 없는 몽당붓, 팔레트에서 긁어낸 물감 찌꺼기 등이 뒤엉켜 있는 상자야말로 내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 즉시 인체연구를 위해 구해두었던 해부학 뼈 모형 중에서 팔을 떼어내 손가락 마디마다 자른 후 붓을 쥔 형태로 재조립하고 그 손아귀에 버린 몽당붓을 쥐어주었다. 그렇게 화가의 손이 만들어졌다" 부조로 제작한 '화가의 손'은 삼부작이며 각각 화가의 성공과 좌절, 현재를 암시한다. 서구의 삼면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작품은 원래 작품이 가지고 있던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것과 유사금박(imitation gold leaf)으로 화면의 전면을 뒤덮은 것, 그리고 재를 미디움과 섞어서 화면에 골고루 바른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덕지덕지 금박으로 박제된 사물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특히 도금된 '화가의 손'은 웬일인지 묘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최태만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평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조각가를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자(he-who-keeps-alive)’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는 예술가야말로 죽음의 파괴를 거부하며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는 존재라는 신념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것은 아닐까. 24k 금박으로 입힌 '화가의 손'을 본면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백골상태의 뼈만 앙상한 손을 금박으로 장식하다니. 그러나 그것이 마이더스처럼 황금에의 환호와 열광을 표상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어쩌면 처참하지만 단호한 손을 통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예술가의 손에 바치는 존경이 이런 형식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6월30일까지.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