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대로]전쟁기념관이 숨긴 부끄러운 6·25 이야기
시민단체, 국방부 등에 전시 내용 변경 제안한강교 폭파, 폭격서 발생한 인명 피해 누락빨치산 내통 이유로 한국 군경 무차별 학살한국군 '위안부' 운영 사실 등 전시 안 해
※ '군사대로'는 우리 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연재 코너입니다. 박대로 기자를 비롯한 뉴시스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군의 이모저모를 매주 1회 이상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흘렀다. 정부는 참전유공자들을 소홀히 대접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남기기 위해 유해 귀환 행사 등 각종 행사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이에 보수진영은 행사 당시 유해를 실어온 공중급유기를 바꿨다는 등 지엽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흠집 내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같은 정쟁 탓에 정작 6·25전쟁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치 공방을 넘어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6·25전쟁 등 우리나라 전쟁사를 소개하는 박물관인 전쟁기념관이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려 다시는 이 땅에서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쟁기념관은 6·25전쟁의 실체를 다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할 만한 내용은 전시에서 빠져있다.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국방부와 전쟁기념관에 전달한 '한국전쟁 70년 용산 전쟁기념관 한국전쟁 관련 전시내용 변화를 위한 정책제안서'에는 전시되지 않은, 아니 숨기고 싶은 6·25전쟁의 이면이 담겨있다. 전쟁기념관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한강을 중심으로 방어전투를 했다는 노량진 전투를 성공적인 작전으로 소개하지만 이는 일부분만을 부각한 것이다. 전쟁기념관은 영상 속 자막에서 '1950년 6월28일 만 3일 만에 서울까지 내려온 북한군이 한강 이남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다짐한다. 국군은 1시45분 하달된 한강교 폭파명령에 의해 2시30분 폭파를 감행한다. 국군 주력의 후퇴로와 서울 시민의 피난길도 함께 막히면서 조기 폭파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한강교 폭파로 한강방어선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을 6일간이나 방어할 수 있었다'고 소개한다.
국방부 스스로 이를 인정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6·25전쟁사'에서 "(한강교 폭파로) 서울 북쪽에서 싸우고 있던 국군은 화포를 비롯한 주요 장비·무기를 대부분 유기한 채 한강으로 분산 철수하게 됐다"며 "국군 철수와는 무관하게 원래 계획된 시간대로 한강교 폭파는 이뤄져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장비·무기 손실을 입음으로써 더욱 불리한 상황에서 한강방어선 전투를 치르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전쟁기념관은 인도교 폭파와 관련된 비판을 빼고 노량진 전투를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킨 성공적인 작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1950년 9월15일 이뤄진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도 칭찬 일색이다. 전쟁기념관은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탈환의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고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됐다"고 소개한다. 인천상륙작전은 군사적 측면에서 성공적이었을 수 있지만 그 무차별성 탓에 많은 민간인을 희생시켰다. 1950년 9월10일 미국 해병 함재기들이 네이팜탄 등으로 월미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월미도에 거주하던 주민 100여명이 희생됐다. 전쟁 당시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숨졌다. 폭격이 민간시설이나 민간인에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미군은 군사적 목표물과 주변지역을 폭격했다.
6·25전쟁 중 민간인 학살은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경찰, 미군 등 전쟁의 양측 모두에 의해 저질러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최소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럼에도 전쟁기념관은 이를 전시하지 않는다. 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사건을 통해 한국 군경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있었다. 1950년 7월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이 수복된 후 인도교 폭파 등 이유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북한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지리산 인근 지역 주민 등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한국 군경에 의한 무차별 학살됐다. 그러나 전쟁기념관은 국군과 경찰, 미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사실은 전시하지 않는다.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주로 1950년 9월 창설된 11사단과 1951년 겨울부터 토벌작전을 지휘한 백선엽야전사령부(백야사)에 의해 저질러졌다.
백선엽야전사령부는 1951년 12월2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 제1기 작전에서 지리산으로 피난했던 '비무장 입산자'를 토벌 대상으로 간주했다. 백야사는 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전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토벌과정에서 생포된 일반 주민들을 수용했다. 열악한 시설과 추위, 장티푸스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전쟁기념관은 6·25전쟁에서 전시 성폭력이 있었다는 점 역시 소개하지 않는다. 육군본부의 '6·25사변 후방전사: 인사편'을 보면 특수위안대가 설치됐다는 사실이 적시돼있다. 이 문서에는 '장기간 교대 없는 전투로 인해 후방 내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해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됐다'는 내용이 있다. 해당 문서에는 '1주에 2회 군무관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했다'는 내용도 있다. 남성의 사기 양양과 성병 전염 예방 등을 위해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했다는 점에서 한국군 '위안부' 역시 국가 차원의 전시성폭력이라 할 수 있다. 특수위안대는 서울지구에 3개 소대, 강릉지구에 1개 소대, 그리고 춘천과 원주, 속초 등에 설치됐다. '위안부' 수는 모두 79명이었다.
후방전사뿐 아니라 당시 참전했던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위안소 운영 기록이 있다. 채명신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 보면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개 운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차규헌의 회고록에는 '사단 훈령부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려 여자 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했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됐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한국군 '위안부' 외에 연합군 '위안부'도 있었다. 보건부가 1951년 10월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이란 문서는 '위안부'를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로 정의하고 있다. 연합군 '위안부'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일터를 옮기거나 여행할 경우에 보고해야 했고, 기타 필요한 지시에 응하지 않았을 때 허가가 취소됐다. 전쟁기념관은 한국군 해외 파병의 주요한 사례인 베트남전에 대해서도 세계 평화에 기여한 군사행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군이 전쟁을 수행하며 발생한 베트남 국민들에 대한 학살과 관련한 사회적 논란은 전쟁기념관 전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