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희의 타로 에세이-1]자아를 포맷하라!
[서울=뉴시스] 타로가 600여 년 이상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하물며 조선왕조도 500년 만에 몰락했는데, 그 사이 수많은 문화가 생장소멸을 거듭했을텐데, 그깟 타로가 뭐길래 지금까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현대에 올수록 타로의 쓰임새는 더 다양해지고 더 각광을 받는 듯 하다.
기원을 찾아보니 의견이 참 분분했다. 애틀란타 대륙이 침몰하기 직전 마법사들이 자신의 지혜를 압축해서 급하게 카드에 그려 넣었다는 설, 고대 이집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었다. 조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재판이 성행할 때 마녀들이 자신의 지식을 카드 속에 숨겼다는 얘기도 있다. 영계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그녀들이 굳이 비밀로 부쳐 숨겨두어야 할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카드 중에는 이단으로 몰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황금새벽회’에서 기원한 것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카드 속에 인생의 지혜를 숨겼다는 것이다. 타로를 ‘아르카나arcana’라고 하는데, 아르카나는 라틴어로 ‘비밀’이란 뜻이다. 도대체 그 비밀이 뭐길래? 난 점을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인생의 지혜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수많은 시행착오와 후회가 범벅이 된 인생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에 타로의 지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도 찬찬히 타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곱해도 언제나 0이 되는 0, 바보 카드는 한 손으로 쥐기엔 버거울 만큼 부피가 있었다. 총 78장이라고 하니 그럴만 했다. 메이저 카드 22장, 마이너 카드 40장, 인물카드 16장이다. 그 중 메이저 카드는 바보의 성장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바보가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겪으면서 ‘현자’가 되는 그 여정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난 헤르만 헤세의 ‘인생은 자아 완성의 길이다’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의 자아탐구 과정이 내 인생의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통상 숫자란 1번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타로는 0번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도 바보의 모습으로. 바보가 말하는 듯했다. 무슨 수를 곱해도 언제나 0이 되는 0. 그렇듯 시작이란 자신을 포맷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자신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시작이라고. 타로는 첫 번째 카드에서 0번과 바보의 모습으로 ‘시작’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늘 철저한 이론과 ‘실탄’을 준비해서 시작하려던 내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낡은 지식이란 위험한 퇴적암 바보가 출발하기 위해 딛고 있는 땅을 보니 더 그 의미가 더욱 확연해졌다.여러 겹의 지층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심지어 길이 끊어져 있다. 여기서 겹겹이 쌓여 있는 지층은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나 지식의 퇴적층이 아닐까. 지식이나 경험이 퇴적암처럼 켜켜이 쌓이면 오히려 고정관념의 위험한 절벽이 된다. 당신을 낭떠러지로 떨어트릴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낡은 지식. 그래서 당신이 진정한 출발을 하고 싶다면 당신의 자아부터 버리라고 바보가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 그래서 시작이란 그토록 위태하고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내가 걸어 온 길이 퇴적암처럼 쌓였다면 그것이 절벽. 켜켜이 자아가 쌓였다면 그것이 절벽. 낡은 지식이 곧 위험한 지층이고, ‘생각’이란 것이야말로 오히려 출발을 방해하고 추진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이란 곧 갈등이 아니던가. 생각이 많은 당신은 지금 가장 위험한 단층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바보는 길 떠나는 자 바보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치고는 봇짐이 너무 작다. 그리고 손에 든 꽃은 또 뭐란 말인가. 봇짐이란 욕심을, 꽃이란 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바보 이반. 프레스토 검프에 나오는 검프. 그 둘의 공통점은 바보라는 것이다. 그 둘은 욕심이 없다. 바보 이반만 보아도 두 형에게 자신의 재산과 군대로 상징되는 힘을 모두 내준다. 또한 그들은 편견이 없다. 단순명료하다. 그래서 한 가지에 집중 할 수 있었다. 검프만 보아도 줄창 달려 미식축구 선수가 된다. 바보 이반도 돌밭 자갈밭 가리지 않고 줄창 밭을 간다. 그 단순함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한 힘이었다. 또한 바보는 낙천적이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발목이 잡히기보다는 옆에 놓인 꽃 한 송이 같은 것에 눈길을 주며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자이다. 길 떠나는 바보를 보자. 아직 산에는 눈이 녹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봄 소풍이라도 떠나듯 옷차림이 가볍기만 하다. 바보는 꽃 한 송이를 든 채 너무도 가볍게 경쾌하게, 눈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떠나고 있다. 타로 0번은 말하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당신의 고정관념을, 당신의 지식을, 그리고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기꺼이 즐거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삶이 제가 누울 관을 지고 산을 오르는 과정이라면 시작이란 그 관뚜껑을 열고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바보가 되는 것이다. ▲조연희 '야매 미장원에서' 시인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