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따라 나선 길…"난 미군 위안부였습니다" [②기지촌여성, 그들은 지금…]
친구·이웃에 속아 기지촌으로…인신매매, 납치당한 경우도확실한 이유없는 빚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악순환정부·지자체, 성매매 특정지역 104곳 설치 '위안부' 관리..."사실상의 포주"'토벌' '컨택' 공포의 대상, 성병관리소"기지촌에서 국가는 사실상 '포주'였다"
①'양공주, 양색시'...고독 택한 70대 노인의 쓸쓸한 죽음 ②'나는 위안부입니다'…'같이 도망갈래?'에 따라 들어선 기지촌 ③전국 최대 규모 기지촌 경기도…사회적 무관심, 생활고 등 이중고 ④원고 엄숙자 외 122명, 피고 대한민국 ⑤현대사의 비극이자 희생양…국가와 경기도 공식 사과 필요 "스물한살 꽃다운 나이에 친구가 다방에 취직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뭔지도 모르고 갔다가 이 지경이 됐어요." 조은자(72) 할머니는 어린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운 탓에 식모살이로 남의 집을 전전했다. 그러다 "돈 벌러 가자"라는 친구를 따라 생각없이 기지촌에 발을 들였다. 시작은 대부분 비슷하다. 6·25전쟁 뒤 먹고살기 어렵던 시절, 오갈 데 없던 소녀들은 "먹고 잘 곳을 마련해 주겠다"라는 친구 또는 이웃의 말에 속아 기지촌에 발을 들였다. 간혹 인신매매를 통해 또는 납치를 당해 온 이들도 있었다. 최영자(72) 할머니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계모의 학대로 고통받던 어린 시절, 서울역 기사식당에서 함께 일하던 언니의 "같이 도망갈래?" 한 마디를 듣고 따라나섰다. 18세 되던 1967년이었다. 최 할머니는 "먹고 자고 할 수 있다해서 따라갔는데 그 사람은 없고 저만 평택 안정리로 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팔아버린 거지…"라고 후회할 수도 없는 과거를 떠올렸다. 기지촌에서는 일해도 빚이 쌓였고, 빚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조 할머니는 "화장품값, 옷값, 침대값 등 다 빚이었어요. 만원 벌면 반은 주인 갖고, 반은 내가 가졌어도 빚이 생기니까 맨날 빚만 지고, 남는 건 없었지"라고 설명했다.
◇성매매 특정지역 104곳 설치 '위안부' 관리 6·25한국전쟁과 냉전·분단을 거치며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주류 판매, 유흥·접객행위, 성매매 등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기지촌'이 생겨났다. 정부는 '윤락행위등방지법' 제정으로 성매매를 금지하면서도 1962년 성매매를 묵인하고 관리하는 특정지역 104곳을 전국에 설치해 '위안부'를 관리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정부가 '기지촌 여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법령, 공문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기지촌 여성'에 대한 연구를 이어온 박정미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1951년 보건부 예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에서 '위안부'를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로 정의했다. '전염병예방법'에도 등장한 공식적인 용어이자 법적 용어였다"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1980년대까지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1951~1989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검색한 720건 중 659건인 91.5%가 '미군 위안부'를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와서 이들이 '위안부'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과거 40년의 역사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벌' '컨택' 공포의 대상, 성병관리소 "수치스럽지. 생판 모르는 남자 의사 앞에서 매주 화요일, 금요일 다리 쩍 벌리고 검사를 받다보니 가장 싫은 건 주사맞는 거, 수술대에 자빠뜨리고 다리 벌리고 있는 거. 검사 통과 못하면 3일이고 1주일이고 갇혀 있는 거야. 통과될 때까지 또 검사 받고, 그 곳에 있는 여자들은 무조건 다 해야 돼. 안 하면 아무 데도 못가요. 페니실린 주사도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고 그냥 하라는 대로 한 거지." 정부는 미군에게 더 나은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성병진료소·성병관리소를 설치했고, '전염병예방법'에 따라 '위안부'는 주 2회 성병검진을 받도록 했다. 이 여성들은 '토벌'로 불리는 미군·경찰·보건소 합동단속이나 성병에 걸린 미군이 여성을 지목하는 '컨택'에 의해 성병관리소에 수용돼 강제 검진과 치료를 받았다. 보건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무차별하게 끌려가기도 했다. 페니실린에 의한 강제 치료는 고통뿐 아니라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 할머니도 매주 받았던 성병검사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미군이 성병 걸렸다'하면 부대에서 헌병이 나와요. 미군이 누구다, 찍어서 알려주면 여자는 도망도 못 가지. 합격할 때까지 거기 있는 거예요"라고 증언했다. 이어 "그거 안 맞으면 죽어요. 그거 맞고 그 약의 부작용으로 보건소에서 죽은 사람도 있어요. 다행히 나는 괜찮았지만, 몸에 안 맞는 사람은 뒤로 자빠졌지.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기지촌에서 국가는 사실상 '포주'였다 1970년대 미국의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 철수 우려가 높아지자 정부는 각부 차관, 경기도지사 등 고위 관료가 참여하는 청와대 직속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때부터 미군 위안부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됐다. 성병 통제를 위해 미군부대가 위안부 사진 또는 검진증 사본을 보관하고, 위안부에게 명찰을 달도록 했다. 또 교양강좌를 통해 인종차별 예방과 성병검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정부가 '주한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을 '애국자'라 치켜세웠다는 주장이다. 최 할머니는 "클럽에 아가씨들을 다 모아놓고 보건소장, 시청 직원 다 나와서 미군에 대해 설명해주고 '검진을 잘 받아야 한다, 성병 안 옮기게 간수 잘 해라,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잘 하는 사람들이다'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검진도, 관리도, 교육도 국가가 실시했다. 그러나 미군에게 얻어맞거나 심지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져도 그녀들을 위한 국가는 없었다. 최 할머니는 "미군이 여관에서 여자를 죽이고 혼자 나가고, 그런 일 많았지. 어느 여관에 아가씨가 죽어 있다, 이런 거 많았어요. 진짜 못되고 심한 사람들도 있었어. 말 안 듣는다고 두들겨 패고, 여자를 막 때리는데 아무도 말리지도 못 해요"라고 당시 아픔을 회상했다. 조 할머니도 "때리는 거 많았지. 부평에 있을 때 미국인이 여자를 패고 여자 아랫도리에 전구를 넣어서 죽였어요. 이렇게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도 신경을 안 쓰니까 데모도 했어요"라고 격앙돼 말했다. 또 "왜 안무섭겠나, 무섭지.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도망가는 사람도 엄청 많았어요. 빚 갚을 능력은 없는데 여긴 싫으니까 엄청 많이 갔지. 근데 그렇게 그냥 사는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1992년 동두천에서는 주한미군 마클 이병이 윤금이(당시 26세)씨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 시민규탄대회가 열리는 등 한미관계 악화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대표는 "기지촌에서 국가는 사실상 '포주'였다. 안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희생시키고, 방조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폭력을 썼다. 엄청난 인권침해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국가 범죄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실상 국가의 폭력으로 수많은 여성이 죽었고, 당시 공권력은 이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서 미군의 편을 들었다. 당시 국가는 경제적, 정치적, 인권적으로 여성들을 착취한 '가해자'였다"고 비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