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한국 독립영화, ‘변방에서 중심으로’
[서울=뉴시스] 서울영상집단에서 발행한 ‘변방에서 중심으로’(시각과 언어, 1996)는 변변한 영화 관련 서적이 없던 시절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묶어 낸 선구적인 책이다. 지금도 여러 대학에서 한국 다큐멘터리 혹은 독립영화를 탐구하는 수업의 필독서로 활용되며 한국 독립영화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지금까지도 중요한 참고자료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책의 날개에 기록된 이름들을 보면, 영화사 연구자이자 출판사 시각과 언어 기획실에 근무하던 이순진과 서울영상집단 대표 홍효숙이 기획자로 이름을 올렸고 영화감독 홍형숙이 책임 집필을,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연출부가 자료정리와 자료조사를 맡았다. 이 책은 영화감독 홍형숙이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훑은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수집한 각종 자료들을 망라한 것으로 체계를 갖춘 책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스크립트를 쓰기 위해 모은 자료와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자료집의 성격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의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가장 오랜 영화운동단체인 서울영화집단의 귀중한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데 큰 가치가 있다. 또 독립영화의 흐름을 정리한 개관을 관련자들의 회람을 통해 정리했다는 점 역시 연구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역사’가 모여 ‘현재’를 이루고, ‘현재’가 모여 ‘역사’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이 출간되던 1996년 당시 활동하고 있던 여러 독립영화 단체들이 비중 있게 수록된 점 역시 이 책이 지닌 장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로 지적될 부분들도 있다. 책날개의 서울영상집단의 소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홍형숙, 홍효숙 자매가 주도하고 있던 서울영상집단이 최초의 영화운동 단체라 칭하는 서울영화집단으로 시작했다고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다. 1982년 설립된 서울영화집단은 1986년 ‘파랑새’를 제작 완성한 후 외연을 넓히기 위해 혜화동을 근거지로 영상 활동을 펼치던 소위 혜화동팀과 결합해 서울영상집단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하지만 소위 ‘파랑새 사건’으로 홍기선, 이효인이 구속됐고, 이들이 출소한 1987년 서울영화집단 출신들과 혜화동팀 사이의 노선상의 차이로 서울영상집단은 사실상 해산됐다. 서울영화집단으로 시작해 서울영상집단으로 확대된 영화운동단체는 1987년 막을 내렸으나 서울영화집단 출신으로 서울영상집단을 만든 이효인·이정하는 1988년 민족영화연구소를, 혜화동팀의 배인정 등은 1989년 노동자뉴스제작단을 만들어 그 활동을 이어갔다. 여기에 홍형숙 등 노동자뉴스제작단을 탈퇴한 인물들은 1990년 서울영상집단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 제작 조직을 세웠다. 1987년 서울영상집단은 해산됐으나 그 구성원들은 한국 독립영화운동의 밑거름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6년 홍형숙에 의해 서술된 ‘변방에서 중심으로’는 한국 독립영화사에서 홍형숙의 서울영상집단을 보다 강조하는 과정에서 서울영화집단의 역사를 독점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찌 보면 서울영화집단의 역사를 잇고 있는 민족영화연구소나 서울영상집단의 한 축을 차지했던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역할과 위상은 축소된 측면이 있었다. 관련자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다행히 올해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기념도서 ‘노동자뉴스제작단 30년을 돌아보다’와 민족영화연구소·한겨레영화제작소의 활동을 증명하는 아카이빙 자료집 ‘영화운동의 최전선’이 발간됐다.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 독립영화운동 단체의 다양한 활동을 증언하는 연구서와 자료집의 출간으로 관련 연구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역사 서술이란 아카이빙을 통해 만들어진 특정한 서사인지도 모른다.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이것을 아카이빙 한다는 것은 역사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그래서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선구적 작업에 뒤이어 나온 이 책들이 반갑고 뿌듯한 일이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