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대로]용산 대통령 시대 열린다…요충지·軍기지 거쳐 새 역사
내달 윤석열 당선인 취임 후 용산서 집무용산 둔지산 일대, 삼남 가는 중요한 길목일제, 한국 침략 위해 용산 군사기지 건설일제서 넘겨 받은 美, 현재까지 용산 주둔
이번 대통령 집무실 입주는 용산 일대 역사에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한미연합사가 평택 험프리스 기지로의 완전 이전을 앞두고 있고 합동참모본부는 남태령으로 옮겨간다. 미군 기지가 있던 곳에는 용산공원이 들어선다. 윤 당선인 부부가 머물 대통령 관저도 용산 둔지산 일대에 조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용산 지역은 예로부터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이 때문에 용산 대통령 시대 개막에 앞서 이 지역의 역사적인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김태우 신한대 리나시타교양대학 교수와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최근 '용산구 둔지산의 장소성 소멸 과정과 복원에 대한 시론' 논문에서 새 대통령 집무실 위치가 있는 용산 일대의 역사적 의미를 소개했다. 조선시대에 용산 지역 둔지산 일대는 삼남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한양 도성에서 삼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작나루와 서빙고나루를 건너야 했다. 숭례문을 나와 동작나루와 서빙고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나야 하는 곳이 용산 둔지산이었다. 용산 둔지산 인근에 전생서와 이태원, 와서, 서빙고 등 관서가 설치돼있었다. 이곳에는 군관과 관리, 관노, 부역자가 다수 거주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해상 교통이 발전했다. 경강(서울의 뚝섬에서 양화 나루에 이르는 한강 일대) 유역 인구가 늘었다. 인구가 늘자 새로운 방(坊)이 개설됐다. 이렇게 개설된 방이 두모방, 둔지방, 한강방, 용산방, 서강방이다. 이 가운데 용산 둔지산 일대가 둔지방이었다. 둔지방은 18세기 중반에는 서빙고1계, 서빙고2계, 지어둔계, 와서계, 이태원계, 청파계, 전생내계, 전생외계 등 마을로 구성됐다. 이 같은 공간 구성은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됐다.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는 "老人星壇(노인성단), 圓壇(원단), 靈星壇(영성단), 風雲雷雨壇(풍운뇌우단)은 모두 숭례문 밖 屯地山(둔지산)에 있다"고 소개했다. 원단과 풍운뇌우단, 영성단, 노인성단은 조선시대 당시 국가적인 의례를 열던 제단이다. 원단은 원래 왕이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단으로서 종묘사직과 함께 중요한 제단이었다. 풍운뇌우단(혹은 남단) 역시 왕이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이다. 적어도 몇 년에 한 번, 빈번할 때는 해마다 풍운뇌우단에서 기우제가 열렸다. 왕이 풍운뇌우단에서 직접 제사를 지낼 때가 자주 있었다. 왜 둔지산에 원단이나 풍운뇌우단처럼 중요한 국가 제단이 집중적으로 설치됐을까. 이는 둔지산이 남교에 위치한 유일한 산이기 때문이다. 남교란 '도성 밖 남쪽 교(郊)'를 뜻한다. 남교는 중국에서 황제가 하늘의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다.
이후 둔지산은 일제에 의해 훼손됐다. 일제는 러일 전쟁 기간 중 대한제국을 협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일제는 한성부 남부 둔지방 일대 약 300만평을 수용했다. 일제는 이곳에 영구 군사 기지를 만들기 위해 한국주차군 경리부 임시건축과 주도로 1906년부터 대규모 병영을 짓고 간선 도로 공사를 벌였다. 1908년 일제는 현 용산고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군사 도로를 완성해 용산 병영 남북을 잇는 양대 간선 도로망을 구축했다. 도로망 구축과 더불어 대규모 일본군 병력 주둔을 위한 영구 병영, 청사(관아), 숙사 등 건축물들이 1906년 8월부터 착공됐다. 1909년 9월에는 각 예하 부대 병영 시설과 훈련장이 완성됐다. 1908년 7월 용산 병영 내 한국주차군사령부 청사가 완공됐다. 3개월 후인 1908년 10월에는 필동 2가(현 남산한옥마을 부지)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용산 병영으로 이전했다.
일제가 대륙 침략 발판을 만들기 위해 상주 사단을 설치함으로써 용산 기지가 물리적으로 확장됐다. 사단 증설 공사와 관련해 주목할 대목은 일본군이 대규모 연병장을 만들기 위해 현 국립중앙박물관 인근(용산구 용산동6가)에 있던 둔지미(屯芝味) 마을과 그 일대의 토지 전답을 강제로 수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둔지미 마을 주민들은 1916년경에 현재 보광동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조선시대 둔지산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둔지미 일대는 삶의 터전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군사 기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 무장 해제와 항복 접수를 위해 38선을 그으며 각각 남한과 북한에 진주했다. 용산 기지 내 일본군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 자리에는 하지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 예하의 아놀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7사단이 주둔하게 됐다. 이때부터 주한미군과 용산 기지의 인연이 시작됐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캠프 서빙고는 임시 기지 성격이 짙었지만 전쟁 후 성격이 바뀌었다. 용산 기지는 전쟁 기간 전략적 요충지였던 탓에 큰 피해를 입었다. 미8군은 용산 기지를 복구·재건했다. 미8군은 전쟁 기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을 재활용하고 미8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용산 기지를 재건해 반영구 기지로 조성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9월15일 용산 기지 재건을 마무리할 즈음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에 있던 미8군사령부가 용산 기지로 이전했다. 이후 1957년 유엔군 사령부가 일본 도쿄에서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기지는 동아시아 냉전 최전방 지휘부가 됐다. 이어 용산 기지는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이래 현재까지 한미 연합 방위 태세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해왔다. 정전 협정 당사자인 유엔군 사령부, 한반도 전시작전권을 쥐고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 한반도 내 미군을 통할하는 주한 미군사령부, 대한민국 국방의 메카인 국방부, 합동참모본부가 용산 기지에 오랜 기간 모여있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