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이 놈의 세상 다 씹어줄게…'슬픔의 삼각형'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뒷담화만큼 재밌는 게 어디 있나. 실컷 욕하고 힘껏 비웃고 마음 가는대로 비꼬고 대놓고 조롱하며 박장대소 하다 보면 쌓였던 스트레스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게 아무리 정신승리에 불과해도, 정신승리가 끝난 뒤 찾아오는 건 현타 뿐이라 해도 그 강렬한 카타르시스는 도저히 떨쳐낼 수 없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도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인간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나. 지난해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말하자면 147분짜리 뒷담화다. 이 수다를 정신 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다. 뒷담화 대상이 뭐냐고? 그런 게 어딨나. 걸리면 씹는 거다. 돈·권력·인종·성(性)·젠더·미디어·소셜미디어·인플루언서·정치·경제·전쟁·이데올로기…'슬픔의 삼각형'은 동시대 이슈를 모두 건드린다. 영화 배경인 초호화 크루즈는 세계의 축소판. 외스틀룬드 감독은 각양 각색의 탑승객 뿐만 아니라 배의 총책임자인 선장과 승객 서비스 담당 직원, 주방·엔진·화장실에서 일하는 직원까지 총동원해 오늘날 우리와 이 세상을 풍자한다. 그리고나서 이 배를 폭풍에 휩싸이게 해 뒤집어버리고 탑승자 중 일부를 무인도에 떨어뜨린 뒤 앞서 보여준 사회상을 전복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무인도에 만들어진 그 작은 사회를 두고도 쉬지 않고 조소하고 냉소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흔히 피라미드(삼각형) 형태로 이뤄졌다는 이 세계를 이리저리 흔들고 굴려 가며 킥킥 댄다. 시작부터 끝까지 에둘러 가는 법이 없다는 게 '슬픔의 삼각형'의 가장 큰 매력이다. 세계 최고 영화제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고 하면 스토리는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이 난무할 거라고 지레짐작 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럴 생각이 없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이 작품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롤러코스터가 출발과 동시에 탑승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특별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직관적이고 명쾌하다. 러시아 부자가 똥으로 돈을 벌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폭풍에 배가 흔들리자 심각한 멀미에 시달리던 부자 탑승객들이 토와 설사를 참지 못하고 쏟아내는 식이다. 관객은 이 영화가 던져대는 뼈를 칠 기세로 날아드는 돌직구를 감상하며 그저 웃으면 그만이다. 세 가지 챕터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계급과 젠더가 거꾸로 서게 되는 3부 무인도 스토리다. 오직 생존이 목표인 상황에 직면하자 화장실 청소 담당 여성 직원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은 그가 가진 갖가지 능력을 통해 이 소규모 공동체의 정점에 서게 된다. 고기를 잡을 줄도, 요리를 할 줄도 모르는데다가 못생기기까지 한 부자 남성들은 이 세계의 왕인 애비게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의 삼각형'이 이같은 형태의 사회를 지지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역사 속 숱한 남성 권력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절대적인 힘은 그걸 가진 게 누구이든 간에 썩어서 악취를 풍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비웃는다. 다만 더 정교한 서사와 더 절묘한 메타포를 통해 더 깊은 사유를 원했던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단선적이고 도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애초에 특정 사안을 파고들어가기보다는 두루 훑어보는 걸 택한 작품이기는 해도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스토리와 과도하게 단순화 된 캐릭터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뒷담화 이상의 감각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네필을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슬픔의 삼각형'이 황금종려상을 받을 정도로 높은 성취를 보여준 영화인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슬픔의 삼각형' 수상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에서 이뤄낸 성과와 같은 선상에 놓고 보기도 하나 두 영화는 계급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일부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 빼면 지향점이 완전히 달라 정확한 비교로 볼 순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