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픽사의 사회학, 일단 실패…'엘리멘탈'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엘리멘탈'은 픽사 애니메이션 중 가장 이질적이다. 이 작품은 픽사 어떤 영화보다 메시지를 명확히 내보인다. 물론 이들이 1995년 '토이 스토리' 이후 28년 간 내놓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26편에는 언제나 메시지가 있었다. 다만 그것은 대체로 사랑·우정·꿈·가족 등 인간 개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27번째 영화 '엘리멘탈'은 개인보다는 사회를 본다.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슈는 이민자. 아마도 이 작품 연출을 맡은 게 한국인 이민자 2세인 피터 손(Peter Sohn) 감독이라는 점이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인문학 대신 사회학을 택한 픽사의 변화를 긍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타고난 것이어서 선택할 수 없는 것들과 관련이 있는 이민자 문제를 물질을 이루는 기본 성분인 원소(element)로 의인화 한 픽사의 기발함은 '역시 픽사'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하지만 다분히 현실적이며 급박하기까지 한 문제를 원론적인 수준 이상으로 다루지 못 한 건 '엘리멘탈'의 명백한 한계다. 이민자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에서 잠시 벗어나면 '엘리멘탈'은 가족이 함께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단 눈 호강은 기본이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불·물·흙·공기 네 가지 원소 캐릭터와 이들이 살아가는 도시 엘리멘트 시티를 보면 그 정교함과 생생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픽사라는 집단은 과연 지성·이성·감성 뿐만 아니라 기술력까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걸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각기 다른 원소 특징을 살린 캐릭터, 역시 원소 특색이 두루 담긴 도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엘리멘탈'은 이전 작품들에 투입한 것보다 두 배 많은 시각효과 아티스트를 끌어모았다. 어떤 관객이 보든 자기만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픽사 특유의 스토리 전개 방식은 '엘리멘탈'에서도 인상적이다. 큰 이야기 안에 부수적인 여러 갈래 이야기를 펼쳐 놔 누군가는 로맨스를, 또 다른 누군가는 모험을, 어떤 이는 가족을, 또 다른 이는 꿈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즐겨도 무방하지만, '엘리멘탈'은 결국 이민자라는 큰 줄기로 수렴한다. 네 가지 원소 중 두 주인공 캐릭터인 앰버와 웨이드를 대립하는 성질을 가진 불과 물로 설정한 건 의도적이다. 엘리멘트 시티의 주류인 물이 백인 사회를, 그 안에 타운을 형성하는 불이 (특정할 순 없지만) 아시아 커뮤니티를 상징한다는 건 누가 봐도 명확하다. 앰버의 부모가 익히 알려진 이민 1세대 삶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앰버에겐 이민 2세대의 고민과 혼란이 녹아 들어가 있다. 물 사회가 앰버에게 내보이는 은근한 타자화, 물은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원소(인종) 차별의 내재화 등도 이민자 문제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엔 아시아계 이민자 커뮤니티의 보수성과 폐쇄성, 특유의 끈적하고 엄격한 가족 문화 등도 있다. 말하자면 '엘리멘탈'은 이민자라는 거대한 주제를 개괄한다. 이런 시도는 '엘리멘탈' 이전 픽사에 없던 것이기에 이것을 외연 확장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엘리멘탈'로 보여준 픽사의 사회학은 깊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다시 말해 '엘리멘탈'은 이민자 문제를 건드리고 있긴 하지만 이 이슈 중 특정 문제를 파고들어가 구체화하지도, 특별한 통찰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시종일관 겉을 맴돌다가 적당히 끝을 맺는다. 이민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 받는 어느 부부의 모습으로 문을 연 이 영화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해주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 하나마나 한 얘기다. 고작 애니메이션 영화에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겠지만, 그간 픽사가 인문학으로 보여준 고민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결코 어린이 관객을 위해 쉽고 편한 이야기를 하는 창작 집단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엘리멘탈'의 이런 안일함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민자 2세인 손 감독 작품에서 나왔다는 건 더 뼈아픈 대목이기도 하다. 픽사가 이번처럼 사회 문제를 다루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될 만한 시도를 할 때마다 반복해서 움츠려 드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픽사는 2020년 12월 흑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번째 작품인 '소울'을 선보였고, 2022년 3월에는 중국계 미국인 소년 캐릭터와 그의 가족의 역사를 담은 '메이의 새빨간 거짓말'을 내놨다. 두 작품 모두 높은 완성도를 인정 받았지만, 모두 디즈니+에서 공개했다. 극장 공개가 예정돼 있었으나 코로나 사태를 이유로 온라인 개봉으로 돌아선 것이다. 당시 미국 현지 언론은 주인공 인종이 이 결정에 영향을 준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고, 픽사 직원 중 일부도 "충격적인 결정"이라는 반응을 내보이며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래서인지 '엘리멘탈'이 이민자 문제를 다루면서 보여준 이 허술함이 '소울' '메이의 새빨간 거짓말'의 스트리밍 개봉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의심하게 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