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임군홍을 아십니까?...70대 아들 "엄마 품에 자는 아기가 저예요"
예화랑, 월북화가로 잊혀진 임군홍 재조명아들 임덕진씨 사부곡..."고이 간직한 그림 73년 만에 공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우리는 왜 모네, 앤디워홀, 렘브란트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은 줄줄 외면서 '임군홍'이라는 작가는 모르고 있을까요?" 서울 신사동 예화랑 김방은 대표는 "무조건 이 작가를 알리고 이 작가의 작품을 보이고 이 작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 이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27일 ‘화가 임군홍’전을 개막하는 김방은 대표는 이 전시를 운명으로 여겼다. "만약 임군홍이 북에 가지 않았더라면 외할아버지(이완석·천일화랑 대표)가 1954년 천일화랑에 40명의 근대 미술가들을 대거 모았던 전시에 임군홍 작가의 작품들이 당연히 출품되었을 것이고 이후 한국 사회는 이 위대한 예술가를 기억했을 텐데 이런 저런 사연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저희 아버지(김태성·예실업 대표)가 화랑협회장을 지내던 80년대 초반에 둘째 아들인 임덕진씨가 예화랑을 직접 찾아와 ‘임군홍 전’을 상의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면서, 이렇게 40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된 임군홍 작가와 예화랑과의 인연은 마치 저에게 운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예화랑은 1954년 천일화랑을 창립한 이완석(1915~1969)의 딸 이숙영(1947~2010)씨가 남편 김태성씨와 1978년 인사동에 예화랑을 연 이후 강남 신사동으로 이전했다. 2010년 이숙영 대표가 별세한 후 딸인 김방은 대표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예화랑이 정전 70주년을 기념전으로 선보이는 '화가 임군홍'전시는 임근홍이 남긴 1930~1950년대 그림 120여 점을 전시한다. ◆화가 임군홍은 누구인가? 화가 임군홍(1912~1979)은 월북 화가로 알려져 국내에서 잊혀진 작가다. 1930~40년대 서울, 베이징, 톈진, 신징(만주국 수도, 현 창춘)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였다. 중일전쟁(1937~1945)이 한창이던 때 우한에 살고 있던 조선인 화가로, 마치 '시간 여행자'처럼 살았던 인물이다. 서울에서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0대에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소년가장이 됐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포기, 외가 친척이 운영하는 치과 병원에서 기공사로 일했다. 화가와 거리가 멀게 생활하던 그가 미술가가 된 건 주교공립보통학교에서 만난 김종태와 윤희순 덕분이었다.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한 명은 조선미술전람회 스타 화가였고, 또 한 명은 화가 및 평론가로 활동한 존경받는 미술인이었다"면서 "이들의 영향 아래 임군홍은 보통학교 졸업 후에도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유화를 배우고 야간 학교를 다녔다"고 전했다. 1936년 치과 기공사로 일하면서 만난 간호사 홍우순(1915~1982)과 5년 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홍우순은 결혼 전부터 이미 임군홍의 작품에 반라(半裸)의 모델로 등장하는 대담한 ‘신여성’이었다. 임군홍이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작품 '소녀상'도 그의 아내가 모델이다.
임군홍은 미술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디자인'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무대장치, 실내장식 사업을 벌인 열정의 사나이였다. 디자인 사업이 번창하면서 중국 진출을 꿈꿨고, 전쟁통인 우한에 터를 잡았다. 돈은 벌었지만 중일전쟁이 한창인 우한에서 만난 현실은 끔찍했다. 가슴에 상처를 입은 벌거벗은 여인, 나병에 걸려 길거리를 헤매는 행려병자의 참혹한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조선이 해방되고 중국 내전이 본격화될 무렵 임군홍은 서울로 돌아왔다. 1946년 귀국 후 광고, 디자인, 인쇄 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1948년 초 운수부(교통부)의 신년 달력을 제작하는 데 최승희 사진을 활용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이미 1946년 7월 좌익계 인사였던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한 상태였다. 인기 있는 모델을 활용해 달력을 제작한 것 뿐이었겠지만, 이 정치적인 문제로 그는 수개월 옥고를 치렀다. '좌익' 낙인은 그를 북으로 가게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임군홍은 혼자 북으로 갔다.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이렇게 분단이 고착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김인혜 전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임군홍이 북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이젤에 놓고 그리던 그림 '가족'(1950)은 그렇게 남한에 남겨졌다.
"저 어머니 품에 안겨 자는 아기가 저입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명륜동 집을 팔고 이사나올 때까지 마루에 이젤 위에 그대로 서 있던 그림이지요” 갓난아기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어 백발이 성성하다. 올해로 75세가 된 아들 임덕진 씨는 1950년 6.25때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이후 73년 간 아버지 그림들을 고이 고이 간직해왔다. 그는 "이번 전시에 나온 '가족'은 내 품에서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작품”이라고 했다. 아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부친의 작품을 위한 공간을 따로 두고, 작품보관을 최우선 했다. "어렵던 시절 그림을 팔아야했지만 목돈이 생기면 최고 복원전문가에게 훼손된 부분도 복원하며 100여 점을 보관해 왔다"고 했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는 "아버지의 작품과 평생 대화를 하고 살았던 아들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어 이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다"면서 "독학으로 자기만의 그림 세계를 펼쳤던 풍운아 화가 임군홍은 미술사적으로 재평가되고 기려야 할 작가다. 그의 그림세계를 전 국민 온 세상이 다 봤으면 하는 전시"라고 강조했다. 미술관 같은 전시지만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9월2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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