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와 명상을…버지니아미술관[이한빛의 미술관정원]
[버지니아=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눈을 살포시 감고, 산들바람을 음미하는 표정. 보는 이의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소녀의 이름은 클로이(Cloe). 높이 24피트(약 7.3미터)의 거대한 하얀 두상 조각은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스페인 출신의 조각가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의 작품이 돋보이는 이곳은 버지니아미술관(Virginia Museum of Fine Arts, VMFA)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멜론 패밀리 VMFA는 버지니아 주(州) 수도인 리치먼드에 위치해 있다. 주 정부가 운영하는 공립미술관이다. 1936년 개관 이래 지금까지 버지니아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컬렉션이 압도적이다. 약 5만점에 달하는 영구 컬렉션에는 인상파를 비롯한 시대별 서양미술 작품은 물론 보석 컬렉션, 헬레니즘과 이집트 유물, 일본 목판화를 위시한 아시아 예술품까지 광범위한 규모를 자랑한다. 전시장 규모도 상당해 한 나절을 다 보내도 상설전을 전부 훑기가 어려울 정도다. 대부분 큰 미술관이 그렇듯, VMFA가 막강한 컬렉션을 보유한 데에는 슈퍼 컬렉터의 통 큰 기부가 있었다. VMFA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바로 폴 멜론(Paul Mellon, 1907-1999)이다. 앞선 컬럼에서 소개한 바 있는 내셔널갤러리를 만든 앤드류 W. 멜론의 아들로, 아버지처럼 자신도 평생 모은 컬렉션을 기부한 것이다. 폴 멜론은 평생을 미술품 컬렉션과 자선활동에 바쳤다. 3명의 대통령과 일하며 재무부 장관을 10년가까이 역임한, 동시에 은행업에 종사한 아버지와 달리 그는 가문의 부를 바탕으로 최상의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길러진 혜안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컬렉션을 만들었다.
VMFA에 기증한 멜론 컬렉션은 부인인 레이첼 람버트 멜론(Rachel Lambert Mellon, 1910~2014)과 함께 수집한 작품들이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의 주요 작가 작품이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다. 생각에 잠긴 채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는 여성의 뒷 모습을 그린 르노아르의 ‘몽상가’(The Day Dreamer), 지베르니의 양귀비가 가득 핀 들판을 그린 모네의 풍경화, 무용수를 비롯한 여성을 주로 그렸던 드가의 회화와 조각,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12개월 동안 완성한 14개의 작품 중 작은 창 밖으로 보이는 밀밭 풍경을 그린 ‘세인트 폴 병원 뒤편의 밀밭’과 같은 걸작들이 한 데 모였다. 이외에도 마티스, 보나르, 피카소와 브라크, 라울 뒤피의 수작들도 멜론 부부가 공들여 모았다. VMFA는 멜론 컬렉션을 시기와 작가별로 나누어 영구 전시실을 마련했다. ‘멜론 프렌치 갤러리’, ‘멜론 모더니즘 갤러리’는 미술관의 핵심 컬렉션 답게 건물의 가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멜론 부부는 관심사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작품만 한정하지 않았다. 경주마를 보유하고 사육자로서도 활동했을 정도로 말을 좋아했던 폴 멜론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회화와 조각을 집중적으로 컬렉션했다.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말은 커미션을 주고 조각으로 제작하기도 했을 정도다. 미술관 3층에는 ‘영국 스포츠 아트’라는 전시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레이첼 멜론은 보석에도 조예가 깊었다. 프랑스 출신 보석 디자이너로 티파니에서도 오랜기간 활동했던 쟌 슐름버제(Jean Schlumberger)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는데, 패트론으로 후원하면서 모은 주얼리를 미술관에 함께 기증했다.
◆동시대와 호흡하는 미술관 VMFA는 멜론 부부의 컬렉션이 근간을 이루는 가운데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도 탄탄하다. 1950년대 이후 미국작가가 중심을 잡고 있고, 컨템포러리는 글로벌 작가로까지 확장한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꼽히는 솔르윗은 미술관 벽에 대형 커미션 작업을 4점 남겼다. 이외에도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설치작 ‘공존’(1961), 헬렌 프란켄탈러의 대형회화 ‘마더 구스 멜로디’(1959), 앤디 워홀의 ‘트리플 앨비스’(1963)도 주요 컬렉션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흑인 작가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다. 미술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험과 표현을 반영하는 작품을 꾸준히 모으고 있으며, 2015년부터는 그 규모도 2배이상 키웠다’고 밝힌다. 2019년에는 초상화를 주로 그리는 아프리칸-어메리칸 작가인 키힌데 와일리의 조각 ‘전쟁의 소문’(Rumors of War)을 미술관 입구에 설치했다. 설치식에는 지역주민 수백명이 몰리며, 축제 분위기를 이뤘다. 키힌데 와일리는 이날 단상에 올라 “이 작품은 단순히 인종과 성차별 이슈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개방과 수용’(Openess)에 관한 작업이며, 새로운 미국 2.0이 시작 됬음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커뮤니티로 진화하는 미술관, 그 중심의 정원 사회적 변화와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VMFA는 지역의 ‘커뮤니티’를 자처한다. 중심이 되는 곳은 미술관 정원이다. 주말이면 이곳에선 요가 클래스가 운영되고 날이 좋은 봄가을엔 각종 공연과 행사가 빼곡하게 이어진다. ‘로빈스 조각 공원’(Robins Sculpture Garden)으로 명명된 이곳은 본관과 별관 사이 꽤 큰 잔디밭이 중심이다. 더위를 식혀줄 분수도 빼 놓을 수 없다. 자리를 펴고 햇볕을 즐기는 가족단위 방문객은 물론 반려견과 산책 나온 주민들도 꽤 눈에 띈다. 정원의 주인공은 관람객이다. 곳곳에 자리한 조각들은 ‘조연’을 자처한다. 하우메 플렌사의 ‘클로이’도, 헨리무어의 리클라이닝 피겨(Reclining Figure, 1953-54)도, 아리스티드 마욜 (Aristide Maillol)의 ‘더 리버’(The River, 1944)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존재감을 숨긴 채 관객을 마주한다. VMFA의 정원은 작품으로 채운 외부 갤러리라기보다, 하나의 휴식처에 가깝다. 적극적으로 비워냈기에, 오히려 관객이 참여할 수 있고 커뮤니티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비워진 공간은 ‘소리’로도 채워진다. 바로 사운드 스케이프 작업이다. 로빈슨 조각 정원 한 켠의 예배당은 사운드 아티스트인 제니 C. 존슨의 몰입형 사운드 작품 두 점이 설치돼 있다. 작가가 제작한 소리 조각과 함께 이를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조각, 종이, 회화를 사운드 패널처럼 이곳 저곳에 설치했다. 이 패널들 사이로 두 곡이 울려 퍼진다. 가스펠 합창단의 ‘천국이라는 도시’(A City Called Heaven)와 ‘천국의 가장자리, 휴식’(The Edges of Heaven, Rest)이다. 첫 곡은 가스펠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중적인 곡이고, 두 번째 곡은 명상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음악이 치유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컨셉으로 흑인 작곡가 앨빈 싱글턴의 곡을 샘플링했다. 발랄하면서도 차분한 소리가 예배당에 울려 퍼지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성과 평안’을 떠올리게 된다. 비워진 곳은 이렇게 역동적으로 채워진다. VMFA가 다른 미술관과 다른 지점이다. 화려한 컬렉션과 섬세한 큐레이팅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 정부가 운영하는 공립미술관으로서 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 기관을 지향한다. 누구보다 민감하게 동시대의 움직임을 담아내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VMFA 컬렉션의 토대를 다진 폴 멜론은 자신의 자서전 ‘은수저에 비친 나의 모습’(Reflections in a Silver Spoon)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마추어 시인, 아마추어 학자, 아마추어 기수, 아마추어 농부, 아마추어 군인, 아마추어 예술 감정가, 아마추어 출판인, 아마추어 미술관 경영자 등 내 인생 모든 곳에서 아마추어였다. 아마추어의 어원은 라틴어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추어’로 내 모든 역할을 사랑했다” 값진 ‘예술품’을 쌓아놓은 곳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시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VMFA의 행보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는 ‘아마추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