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관, 모친 기일에 떠났다…"늘 그립고 죄송"
[서울=뉴시스]황소정 인턴 기자 = 국민 트로트 가수 송대관이 그의 어머니와 같은 7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앞서 송대관은 2021년 MBN '특종세상'에 출연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송대관의 모친 고(故) 국갑술 여사는 뇌출혈로 투병하다 2016년 2월 7일 별세했다. 방송에서 송대관은 5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추억하며 고향의 시장을 떠났다. 그는 "저희 어머니가 여기서 비단 늘어놓고 치수 재서 바느질해 주고 포목상같이 했다"며 "우리 어머니가 시집올 때 혼숫감으로 가져온 걸 가지고 밥벌이를 하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머니가) 저희 4남매를 그냥 굶기지 않으려고 일 년 내내 오일장에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니셨다"며 "심지어 시골은 돈이 아니고 물물 교환이다. 고구마, 감자 이렇게 무거운 걸 주면 머리와 팔이 빠지는 것"이라고 어머니를 추억했다. 그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봉안당을 찾았다. 종종 찾는 길이지만 어머니 앞으로 향할 때면 그리움에, 안타까움에 목이 메어온다고. 송대관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다. 고(故) 국갑술 여사는 아들의 복귀 무대를 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그는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며 "한동안 제가 방송을 한 일 년간 출연을 안 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말씀은 안 하셔도 늘 나오는 프로그램에 제가 얼굴을 안 비치니까 항상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고개 숙이고 낙담하셨다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늘 그립고 항상 죄송하다. 다 못 해준 것만 생각난다. 죄송한 건 늘 곁에 있어 주지 못하고 간간이 얼굴 보여드린 것"이라며 "만나 뵙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조금 더 있다가 가라. 뭐가 그리 바쁘냐'며 못 가게 소매를 잡던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슬퍼했다. 한편 송대관은 전날 컨디션 난조로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이튿날 오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오는 10일 방송 예정인 KBS 1TV '가요무대' 출연은 컨디션 문제로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대관은 1980~90년대 트로트 부흥기를 이끈 스타로 태진아, 설운도, 고(故) 현철(1942~2024)과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렸다. 194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로 데뷔했다. '해뜰날' '정 때문에'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네 박자' 등 숱한 히트곡을 남겼지만, 단숨에 스타가 된 건 아니다. 1970년대는 남진·나훈아의 시대였다. 송대관은 오랜 무명 시절을 지내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긴 무명시절을 겪은 송대관을 대신해,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75년 발표한 곡 '해뜰날'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각종 상을 휩쓸며 명실상부 송대관의 시대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는 특유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음색으로 사랑받았다.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던 극장 쇼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송대관은 1980년대 돌연 가수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후 1989년 '혼자랍니다'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정 때문에' '차표 한 장' '큰 소리 뻥뻥'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 잇따라 히트곡을 내며 당대를 대표하는 트로트 가수가 됐다. 특히 송대관은 대중의 애환을 달랜 곡으로 주목받았다. 1998년 '네박자', 2003년 '유행가' 등도 히트시키며 최고의 트로트 가수임을 입증했다. 그는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 친근한 이미지로 사랑받으며 연기에도 도전했다. 드라마 '공주가 돌아왔다'(2009) '신기생뎐'(2011) '웰컴 투 힐링타운'(2012) 등에 출연했다.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와 갑작스러운 비보는 안타까움을 더했다. 송대관은 지난해 11월 정규 앨범 '지갑이 형님'을 발매했다. 지난달 19일 방송된 KBS 1TV '전국노래자랑' 서울 성동구 편에 초대 가수로 나와 '지갑이 형님'을 열창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