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자식이라고 차별해서야 되겠는가, 조선 ‘통색촬요’
“태종대왕 15년(1415) 서얼 자손은 현직(顯職)에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대언(右代言) 서선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문헌비고 조선은 중국이나 고려 때와 달리 서얼을 몹시 차별했다. 양반 사족(士族)의 자손이지만 어머니가 첩이라는 이유로 양반의 지위에서 도태됐다. 가정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적자(嫡子)의 형제를 형·동생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전’ 그대로다. 봉사(奉祀), 상속에서도 적자손에 비해 심한 차별을 받았고 벼슬 진출 또한 불가능했다. 가장 혹독한 것이 서얼의 과거응시를 금지하는 서얼금고법이다. 임진왜란 이후 시대변화에 따라 서얼은 기존 신분제의 모순에서 오는 처지를 개선하려고 애썼다. 서얼도 점차 관직에 나아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탕평 군주 영조와 정조대에는 서얼에 대한 관심과 허통의 노력으로 서얼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됐다. ‘통색촬요’를 보면 그 과정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 본디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서얼을 금고하는 것은 곧 우리나라의 잘못된 제도이며 고금 천하에 없던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재가 적으니, 비록 한 시대의 인재를 모두 쓰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가 되는데, 제도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차별이 매우 심하여, 하늘이 내려 주신 인재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들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인(賤人)의 자손들도 오히려 벼슬길에 소통이 되기도 하는데, 사대부 집안의 서얼은 자자손손 한결같이 단단히 금고를 당해서, 비록 남다른 재주와 지혜를 지닌 인재일지라도 하류에 침체되어 평생을 마치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영조 즉위년(1724) 12월17일 이조 판서 김상용 회계 “아, 저들 서얼도 나의 신하인데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그 포부를 펼칠 수 없게 한다면 이 또한 과인의 잘못이다. 양전(兩銓)의 신하들에게,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이들을 소통시킬 방도와 장려하여 발탁할 방안을 특별히 더 강구하게 하되, 문관과 음관, 무관은 어느 관직까지로 제한을 둘 것인지 그 품계를 가늠하여 차등을 두고 세칙을 상세히 마련하여 벼슬길을 넓혀 주라고 분부하라.”-정조 1년(1777) 3월1일 전교 ‘통색촬요’의 원본은 4권이다. 도입부인 제1권은 조선 초기 서얼의 금고 과정~숙종대 서얼 허통 주요 논의나 정책을 모았다. 2권은 영조대 서얼 허통 정책을 정리했다. 3, 4권은 정조대의 정책을 기록했다. 4권 말미 ‘칠조문답’은 서얼의 시각에서 허통의 당위성과 역사적 논거를 종합했다. “한평생 차별만 당하던 서얼은 운좋게 성군(聖君)을 만나면 그들의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서얼에게 주어진 관직은 기껏해야 몇 안 되는 문관, 무관, 음관직 뿐이었다. 이나마도 성군이 승하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회수되고는 하였다. 서얼에게 성군은 탕평 군주로 알려진 영조와 정조였다. 영조와 정조가 재위했던 18세기는 신분 차별이라는 고질적 폐단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시련을 겪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경화 사족 출신의 집권 노론은 왕실과 혼인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강력한 문벌 집단을 형성하였고, 왕위 계승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이를 군주로 내세우는 등 조선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영조와 정조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능력을 끊임없이 실험했으며, 각자의 재능에 맞는 관직에 임명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박헌순·남지만·하현주 옮김, 464쪽, 2만원, 한국고전번역원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