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빈의 클로즈업 Film]'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원더우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면을 쓰는 재벌도, 정체성 혼란을 겪다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신의 아들도 아니다. 원더우먼은 타고난 품성이 바르고 정의로운 영웅이다. 날 때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태어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소명을 다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원더우먼'(감독 패티 젱킨스)의 매력은 정직하고 순수하며 그러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 그러니까 전통적인 성격의 영웅을 러닝타임 내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 스스로 만든 대재앙인 20세기 초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고전적인 질문 하나를 던진다. '인간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여기서 원더우먼은 자문한다. '만약 악하다면 이들을 구원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는 인간이 만든 지옥 같은 세계를 헤쳐나가다가 곧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사랑과 희망을 본 후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잠재 능력을 폭발한다.
반면 캐릭터는 흠잡을 데 없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수준 이하의 연출력을 보여준다는 게 DC의 히어로 영화가 반복해서 비판받은 지점이었다(마고 로비의 '할리퀸'은 지난해 최고 캐릭터였다). 이런 우려 속에서 '원더우먼'을 맡은 패티 젱킨스 감독은 과감한 결단력으로 이런 지적에서 벗어난다. 젱킨스 감독의 결단은 결국 불필요하거나 중요치 않은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해 이야기를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치밀하게 만드느라 스텝이 꼬이는 것보다 다소 불안한 감이 있더라도 보폭을 크게 가져가며 관객을 141분 동안 영화에 묶어놓는 전략이다.
원더우먼으로 변신한 배우 갤 가돗은 영화를 장악하는 힘을 보여준다. 가돗의 연기력은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원더우먼이라는 캐릭터와 일치하는 눈빛으로 관객을 설득해나간다. 가돗의 반듯한 외모 또한 정직함과 열정을 무기로 하는 원더우먼의 영웅성과 부합하는데, 가돗과 함께 헨리 카빌·벤 애플렉을 시리즈에 합류시킨 캐스팅 능력은 DC가 마블에 뒤지지 않는 점 중 하나일 것이다('플래시'를 맡은 에즈라 밀러 또한 큰 기대를 받고 있다). 가돗의 부족한 연기력을 채워주는 크리스 파인의 안정적인 연기도 만족스럽다. 현재 세계 영화 시장에 나온 히어로 영화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원더우먼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마블은 2019년 '캡틴 마블'을 내놓는다). 원더우먼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탄생했지만, 페미니스트들의 강한 비판을 받아온 캐릭터다. 강한 여성상을 내세우면서도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갖가지 설정 때문이었다. 영화 '원더우먼'도 다르지 않다. 페미니즘을 의식한 듯한 장면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고, 외모에 관한 일부 대사들은 원더우먼을 향한 달라지지 않은 시각을 반영한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