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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③조마리아는 누구…독립운동 대모로 꼽히는 '민족 엄마'

등록 2019-02-18 11:00:00   최종수정 2019-02-25 09: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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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진영의 '정신적 지주', '대모'

안중근의 母 "대의에 죽는 게 효도다"

불꽃 같은 안중근, 등불이 된 조마리아

독립운동 도움 되는 일이라면 앞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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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마리아 생전 모습.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1910년 3월26일 서른두살 밖에 되지 않은 장남 안중근을 잃은 조마리아(1862~1927, 본명 조성녀)는 두 달 뒤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망명했다. 일제는 집요하게 조마리아와 그 가족을 쫓았다. 이들은 추격을 피해 10년이 넘는 시간을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일대를 떠돌다가 1922년 6월 이후에서야 지나서야 온전히 정착했다.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였다.

유랑의 피로를 덜어준 건 비슷한 처지의 한인들이었다. 이들은 조마리아 가족을 지원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도산(島山) 안창호와 백범(白凡) 김구도 도왔다. 이유는 하나, 조마리아 존재 자체가 이들에겐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일제강점기 핍박받는 자들의 '정신적 지주' 혹은 '대모'(大母)였다. 우리에겐 이름도 낯선 조마리아가 대체 누구길래.

"의사의 자당은 해외에 온 후로 거의 영일 없이 동은 해삼위로 서는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의 경성(警醒)에 종사하였다."('독립신문' 1920년 1월31일자)

풀이하자면 "조마리아 여사는 해외에 온 이후 쉬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과 바이칼 호수에 이르기까지 동포들을 각성시키는 일을 했다"는 얘기다.

가부장 문화가 압도하던 그 시대에 어떤 여성이길래 동포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었느냐, 라고 묻는다면 설명을 늘어놓기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조마리아는 독립운동에 투신해 집을 떠나는 장남 안중근에게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했다. 아들이 적과 싸우다 결국 붙잡히자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고 말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들은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1910년 2월14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어머니 조마리아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 다음 달 26일 형장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고 이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 조마리아의 아들이 바로 안중근이다.

조마리아가 거대한 '불꽃'으로 타올랐다가 사그라든 의사(義士) 안중근의 어미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건 아니다. 거사를 치른 아들과 같은 폭발력은 없었을지 몰라도 조마리아는 스스로 조용한 '등불'이 돼 안중근과 같은 불꽃들의 대의를 적극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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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어머니 조마리아가 만든 수의를 입은 안중근 의사.
한국여성항일운동사를 연구한 박용옥 전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조마리아를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후원자, 지원군"로 평한다. 박 전 명예교수는 책 '한국여성독립운동가'에서 "조마리아와 그 가족은 상해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는 전투장에서 만군을 얻음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특히 상해 교포들에게는 영웅의 어머니인 조마리아와 상해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공기를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용기백배가 되는 것"이었다고 썼다.

고향을 떠나온 자들이 모인 연해주나 상해에서 일선에 투입된 독립운동가들이 안정적인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남겨진 가족의 평화, 더 나아가 교민 사회의 안정이 필요했을 텐데 그 역할을 한 게 조마리아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2013년 '민족사상'에 조마리아 연구 논문을 게재한 오일환 의병정신선양회 회장(전 보훈교육원장)은 "교민 사회에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나서서 해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또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의 아내들과 힘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 사격했다"고 설명한다.

이뿐만 아니라 조마리아는 독립운동가들 간 이견으로 다툼이 있을 때에도 특유의 온화한 리더십으로 타협의 다리를 놓는 일종의 '재판관'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테면 조마리아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셈이다. 그래서 대동공보 편집장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강은 훗날 조마리아와 안중근을 이처럼 표현했다. "범이 범을 낳았다."

조마리아는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주저 없이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상해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한 일은 대표적인 예다. 이 후원회는 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1926년 7월 상해 거주동포 208명이 상해 삼일당(三一堂)에 모여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했는데, 위원장에 안창호, 서무위원에는 조상섭, 재무위원에는 진희창이 각각 선출됐고, 조마리아는 최승봉, 김보연 등과 함께 정위원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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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마리아 회갑 기념사진.
또 그는 상해 동포들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봉사 활동에도 힘썼다. 타지에서 상해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 돌봄이 부족한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이라든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일 등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이 될 만한 삶을 산 것으로 전해진다.

조마리아는 1927년 7월15일 상해에서 별세했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장례는 프랑스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해 교민장으로 치렀고,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이후 도시개발로 묘지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됐다.

2008년 8월 정부는 조마리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해 그가 독립운동가임을 명확히 했다. 국가보훈처는 2017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조마리아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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