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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②'항일영웅' 이신애는 누구…민족 33인중 유일한 여성

등록 2019-02-19 06:00:00   최종수정 2019-02-25 09: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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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받아들인 집안 덕 근대교육 혜택

'여성교육' 요람 학교에서 수학하고 교편

학생들에 '민족의식' 교육 사명으로 삼아

손정도 목사 설교후 상경해 '독립투사'로

항일 여성 단체에 몸담다 대동단도 가입

옥중서도 이어진 '만세운동'…저항 계속

출옥 후 교육사업…부녀계몽운동 진행

말년 가난…정부 마련 집서 1982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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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말년의 독립운동가 이신애.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서울=뉴시스】안채원 기자 =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이신애는 1891년 1월20일 평안북도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아 '여성교육'의 요람이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원산 성경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교사이자 전도사가 됐다. 사람들의 존경과 물질적인 여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신애는 항일독립운동가의 삶이라는 가시밭길을 택한다.

사실 이신애는 처음부터 '편하게' 살 생각이 없었다. 이신애가 교편을 잡은 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이었다. 이신애는 지금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민족운동의 '적기'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걸 사명으로 삼았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흐른 1918년, 그녀의 인생이 뒤바뀐다.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손정도 목사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녀가 항일투사로 '전향'한 데는 손정도 목사의 영향이 컸다. 1918년 어느 겨울날, 손 목사는 원산 시내에 있는 원산교회에서 특별 부흥강사로 초빙돼 설교했다. 당시 손 목사는 "각 민족은 스스로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소개하며 독립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이신애는 1919년 2월, 교편을 내려놓고 민족운동의 중심지인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이신애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5월부터는 항일여성독립운동단체인 혈성부인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수감된 독립투사들을 돌보는 한편 임시정부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는 데 힘썼다.

특히 이신애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적극 지원했다. 구체적으로 총살할 장소와 시간 등을 알아내 정보를 주고 그의 은신을 도왔다.

이신애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단연 '조선민족대동단' 활동이다. 이신애는 부인단 총대에 선출돼 여성동지들을 비롯한 단원들을 모으는 데 힘썼다. 또 대동단의 주요계획 중 하나였던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 작전에도 가담했다.

당시 대동단은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켜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것을 계획했다. 이신애는 연락책 역할을 맡았고 무사히 이강은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거쳐 도착한 안둥역에서 이강이 체포되며, 상해망명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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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신애를 항일투사의 길로 이끈 설교를 들려준 손정도 목사. (사진 =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대동단원들이 잡혀가 조직이 해체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신애는 관련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제2조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33인 대표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919년 11월28일 서울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앞 광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이신애는 예심 진행 중 3·1운동 1주년을 맞았다. 이신애는 같은 형무소에 있던 유관순과옥중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 일로 이신애는 유방과 고막이 파열되는 극한 고문을 받아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신애는 굴하지 않았다. 옥중 생활은 오전 7시 일장기에 경례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지만 이신애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몰래 만든 태극기를 방 안에 걸고 경례를 했다.

의친왕 망명 사건을 가르키는 대동단사건 등에 가담한 이유로 3년 형을 선고받은 후 1925년 3월, 이신애는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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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대동단의 의친왕 망명사건을 다룬 1919년 11월27일자 매일신보의 기사. (사진 =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출옥 후 이신애는 교사였던 역량을 살려 여성교육활동에 힘썼다. 여학교를 설립해 교편을 잡거나 유치원을 세웠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부인회를 조직했고 1947년부터 11년간은 부녀계몽운동에 진행했다.

말년은 간고(艱苦)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에서 마련해준 대전의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살다 1982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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