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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지옥을 함께 경험한 이들의 설원 같은 연대·자비···오페라 '1945'

등록 2019-09-29 12:13:57   최종수정 2019-10-07 09: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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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1945'. ⓒ국립오페라단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무대 하나로, 그간 못 봤던 세상이 드러나는 날이 있다. 국립오페라단이 27, 2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오페라 ‘1945’의 일격(一擊)에 마음과 머리에 동시에 환기됐다.

2017년 국립극단이 초연한 배삼식 작가의 동명 연극 '1945'가 바탕인 이 오페라는 흥미롭게 논쟁적이며 대중적이다. 가사(假死) 상태에 가깝던 한국 창작오페라계에 전기 충격을 가할 만큼 새 숨결을 불어넣었다. 인터미션 20분포함 러닝타임이 세 시간이 훌쩍 넘지만 공연 내내 절로 경추(頸椎)를 세우게 된다.

해방 직후인 1945년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머물렀던 전재민 구제소가 배경. 국립오페라단이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오페라로 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속하던 해방기가 됐던 고초를 겪으며 삶의 벼랑 끝에 밀려나는 민초들의 삶을 그렸다.

조선인 위안부 '분이'가 이야기 중심축에 있다. 그녀는 전재민 구제소 사람들에게 일본인 위안부 '미즈코'를 벙어리 동생 순이라고 속인다. 결국 미즈코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악한 일본인과 착한 조선인으로 대변되는 뻔한 선악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에 대한 연극의 질문은 오페라에서 선율을 타고 다른 방식으로 환기된다.

음표를 빌린 노랫말은 다양한 감정을 압축하고 있기에, 칼날 같은 음성언어를 뛰어넘어 교감하는 힘이 있다. 극 중에서 가족을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분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 오인호와 분이의 이중창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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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와 분이의 연극 이름은 영호와 명숙이다. 연극에서 영호는 분이와 미즈코가 위안소에 있던 사실이 드러난 뒤 사람들의 비난을 받자 "진창에 더 깊숙이 빠진 게,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게 이 여자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 그런데 다시 저 여자들을 진창 속에 밀어넣구 가자구요? 우리가 씻어줘야죠. 그 고통을. 지옥에서 건져내야죠"라고 두둔해준다.

하지만 자기 중심적 위안은, 상대방에게 위안을 주기는커녕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명숙은 "당신이 뭔데, 우릴 데려가구, 버리구 한다는 거야? 씻어 줘? 우리가 더럽다구? 아니. 우리 더럽지 않아. 누가 누굴 보고 더럽다는 거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연극에서 날카롭게 가슴을 저격한 이 말들이 오페라에서는 인호와 분이의 애절하면서도 비장한 이중창이 돼 묵직함을 안긴다.

배 작가는 연극을 쓰면서 최종적으로 대면하고 싶었던 순간은 어떤 말이나 행위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 즉 말과 행위가 소용을 다하는 순간이었고 음악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는데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배 작가는 연극 '1945' 대본을 개작해 오페라 '1945' 대본 작업도 직접 했다.

최 작곡가의 음악은 배 작가가 음악이 날아오를 수 있게끔 만들어낸 여백을 자유롭게 누빈다. 비통함, 절박함, 향수 등의 정서가 담배하지만 뭉근하게 차오른다.

음악적으로 다양하데 듣는 재미도 준다. 테마 선율이 된 동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비롯 기존에 있는 다양한 음악들이 다채롭게 변주된다. 작품의 배경이 된 당시 1930~1940년대 유행했던 창가와 군가를 비롯 '울리는 만주선'과 같은 트로트, 일본 전통 대중가요의 하나인 엔카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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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가 평안북도 철산이라 어머니를 통해서 역사적 질곡을 들으면서 자란 최 작곡가의 DNA에 자연스레 새겨져 있던 곡들이다. 그의 심장이 내뿜은 음악적 피가 혈관을 따라 뇌 구석구석 퍼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만주의 전재민 구재소와 일본인 위안부는 그간 우리 기억이 미처 머물지 못했던 기록이다. 이야기 전개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오페라는 모(母)작품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계와 삶 앞에 설 때 가치 판단의 억압과 폭력을 톺아보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따져 물었던 연극의 사명은 오페라에서 확장된다. 때론 연대와 자비에 대한 외침은 직접적인 언어보다 선율이 될 때 더 강렬해진다.

소프라노 이명주와 김순영이 각각 분이와 미즈코를 맡았는데 오페라 가수는 노래뿐 아니라 연기도 필요조건임을 상기시키며 열연한다. 정치용이 지휘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촘촘한 음악도 감동의 역치를 끌어올렸다.

미장센도 빼놓을 수 없다. 2막 마지막 솥에서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떡 익는 구제소 장면, 4막 마지막 실물 기차가 들어오는 듯한 장면은 이태섭 무대 디자이너와 고선웅 연출이 빚어낸 회화적 풍경이다.

절정은 진짜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진다. 고난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특유의 약동하는 리듬과 절망하지 않는 한의 정서로 끌어온 고 연출식 마법이 이뤄지는 순간.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지 못한 분이와 미즈코가 하얀 설원에 서 있다. 역대 공연 작품 중 가장 서정적 애이불비(哀而不悲)일 장면. 속으로는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을지라도, 함께 지옥을 경험한 이들의 연대와 자비는 눈부시다.

감동과 각성과 여운을 동시에 주는 한국 창작 오페라를 이제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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