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근형 연출 "남성중심 문화 비꼬고 싶었다"
경기도립극단과 신작 '브라보, 엄사장' 12일 개막기득권 실상 파헤친 블랙코미디봉준호 감독이 존경하는 거장..."봉감독은 매너가 좋은 분"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연출을 지난달 21일 광화문에서 만났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위기 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되기 직전이었다. 같은 달 23일 위기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이 되면서 그가 경기아트센터 소속 예술단체인 경기도립극단과 손잡은 연극 '브라보, 엄사장'의 개막도 이달 5일에서 12일로 미뤄졌다. 자연스레 인터뷰 공개도 연기됐다. 하지만 코로나 19의 확산세가 계속되면서 결국 공연은 취소됐다. 대신 12일 오후 4시 경기아트센터 유튜브 채널 '꺅티비'를 통해 무관중으로 공연 실황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브라보, 엄사장'은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최근 경기아트센터로 이름을 바꾼 이 기관이 올해 처음 도입한 시즌제의 문을 여는 작품이었다. 그 만큼 작품적, 흥행적인 측면에서 기관이 자신을 해왔는데 코로나 19로 관객과 직접 만나는 것은 뒷날을 기약하게 됐다. '브라보, 엄사장'은 박 연출의 '엄사장 시리즈' 결정판이다. 2005년 명동 삼일로창고극장 30주년 기념작으로 초연한 '선착장에서'를 시작으로 '돌아온 엄사장', '엄사장은 살아있다'로 이어진 일종의 연작이다. 엄사장뿐 아니라 자신의 멋대로 사는 '황마담' 등의 캐릭터가 계속 등장한다. 초연한 해에 '올해의 예술상'을 거머쥔 '선착장에서'는 울릉도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부도덕하고 부조리적인 사람의 처량한 모습을 담아냈다. "제 부모님이 두 분 다 이북분이세요. 그래서 설이나 추석 때 성묘를 갔다, 다른 지역을 돌아보는데 어느 날 울릉도에 갔죠. 선착장이 보이는 다방에 앉았어요. 손님들이 선착장을 바라보면서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울릉도 사람들에 대해 훤히 알겠더라고요. '구수한 풍경'이었죠. 그 때 '선착장에서' 구상이 시작됐어요."
박 연출은 엄 사장을 통해 때로는 역설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라낸다. 그는 블랙코미디에 대해 "쉬워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일반적이거나 상식적이지 않고 엉뚱한 구석이 있어야 하죠. 예컨대 황 마담의 경우는 항상 만삭인데 애연가예요.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인 거죠"라고 설명했다. 결국 '브라보, 엄사장'은 폭력에 희생당하는 약자들의 이야기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폭력을 꼬집는다.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을, 사회에서는 여성을 존중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몇 년 전만 이렇지 않았죠. '애들은 가라' '여자가 뭘 아니'라는 폭력적인 말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런 현상의 문화가 남아 있는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앞서 2012년 박 연출은 화성시문화재단과 함께 개발한 연극 '화성인, 이옥'으로 경기도립극단과 작업한 적이 있다. 이 극단이 속한 경기아트센터는 수원에 위치한 경기도를 대표하는 공립 공연장이다. 하지만 대형 공연이 많은 서울과 가까워 오히려 지역 관객을 끌어들이기 힘든 구조다.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연극이 낯설지 않고, 어렵지 않은 것이 중요하죠. 이번에 센터 측에서 여러가지 지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저만 잘하면 됐죠." 이처럼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지만 박 연출은 대학로에서 존경을 받는 거장 중 한명이다.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 아버지' '너무 놀라지 마라', '엄사장' 시리즈 등을 통해 한국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전 정부에서 '연극계 블랙리스트'를 촉발시킨 국립극단의 '개구리' 연출가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지난해 영화 전문지 '씨네21'과 인터뷰에서 '기생충'을 연극으로 연출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내가 쓴 스토리라인으로 존경하는 연출가 박근형 선생님이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고 나는 영화로 찍는 안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박 선생님을 뵙기도 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예전부터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며 배우를 점찍는 것으로 알려졌다. 봉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고수희, 봉 감독의 대표작 영화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 나온 박해일, 영화 '옥자'에 나온 이봉련이 극단 골목길 출신이다.
봉 감독에 대해서는 "매너가 좋은 분"이라고 했다. "배우를 캐스팅하실 때뿐만 아니라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가 완성된 이후에도 좋은 배우 덕에 잘 촬영했다며 저에게도 감사 인사를 해주세요. 저야 말로 감사하죠"라고 했다. 대학로에 박 연출만큼 좋은 배우를 발굴하는 연출가도 없다. 고수희, 박해일, 이봉련 뿐만 아니라 골목길의 신작 '겨울은 춥고 봄은 멀다' 등 박 연출의 최근 모든 작품에 출연 중인 배우 강지은에 대한 TV, 영화계 러브콜로 잇따르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 경기도립극단의 배우들에 대해 크게 만족했다. 특히 엄 사장 역의 김길찬, 황 마담 역의 박현숙은 경상도 사투리를 유연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능수능란한 연기를 선보인다고 봤다. 김길찬에 대해서는 "성실한 엄청 노력파"라고 했다. 박현숙과는 과거 대학로 공간사랑에서 함께 작업한 적이 있다면서 "도립극단 배우 중 가장 연장자인데 앞장서서 모범을 보인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박 연출 같은 거장이 버티고 있고, 봉 감독 같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자양분을 삼고 있지만 대학로는 여전히 열악하다. 최근에는 코로나 19 사태까지 겹치면서 가사상태(假死狀態)에 가깝게 됐다. 그럼에도 박 연출은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제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젊은 연극인들이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저는 이제 내려가는 쪽이죠. 그런데 대중분들이 잘 모르는 젊은 연출가, 배우들이 구석 구석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 분들 끈기 덕에 빛을 발하는 경우도 많죠. 저는 현재 대학로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지 않아요. 계속 훌륭한 작가, 연출가, 배우들이 나올 거라 믿습니다." 박 연출 본인은 나이가 들어 몸이 게을러지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창조적인 생각이 무뎌지는 것은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많이 게을러서요.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의 말과 달리 눈빛은 형형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