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문자가 주는 평온...갤러리현대, 김창열 'The Path'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칠거칠한 캔버스, 목판, 모래, 흙과 같이 즉각적으로 물질성을 보여주는 표면 위에서 직접 작업하곤 했다. 하지만, 화면이 커짐에 따라 캔버스는 물질성을 상실했다. 그 자리를 공허감이 대신했다.” (김창열, 2003) '물방울 화가' 김창열(91) 화백 개인전이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23일부터 열린다. 'The Path(더 패스)'를 주제로 여는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와 김창열이 함께하는 열네 번째 개인전이다. 특히 2013년 김창열의 화업 5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여는 전시다. 갤러리현대는 "김 화백과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 중인 김창열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며 "당시 전시를 계기로 파리에서 호평을 받은 그의 ‘물방울 회화’ 작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고, 미술계 안팎으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작가의 인지도도 크게 올랐다"고 밝혔다.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물방울 그림'이지만, 이번 전시는 물방울과 함께 거대한 맥을 형성하는 ‘문자’에 초점을 맞췄다. “한자는 끝없이 울리고 끝없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맨 처음 배운 글자이기 때문에 내게 감회가 깊은 천자문은 물방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김창열, 1998) 문자는 캔버스 표면에 맺힌 듯 맑고 투명하게 그려진 물방울과 더불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 화백에게 문자는 이미지와 문자, 과정과 형식, 내용과 콘셉트,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미적 토대이지만, 그동안 이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물방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진했다. 그는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을 통한 동양적인 조형 공간의 합일을 이루어내기 위해 재료의 사용에도 연구를 거듭했다. 종이에 글자 쓰기를 연습하듯 한지를 캔버스에 부착하고 여기에 천자문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문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겹쳐 썼다. 김창열은 한지에 먹으로 선을 겹겹이 교차시켜 문자의 층을 만들었다. ㄱ러나 한자를 무수히 여러 겹 쌓은 작품은 문자의 층이 겹쳐도 색이 탁해지거나 어둡게 가라앉지 않는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겹쳐 쓴 천자문은 특정한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천자문(진리)을 넘어서는 무한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작가는 물방울과 천자문의 관계를 통해 작품을 마주한 관객을 문자 너머 진리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문자와 물방울이 만난 김창열의 대표작 30여 점이 전시된다.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1975년 작품 '휘가로지'(1975)를 포함해, 한자의 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형상이 캔버스에 스민 듯 나타나는 1980년대 중반의 '회귀(Recurrence)' 연작, 천자문의 일부가 물방울과 따로 또 같이 화면에 공존하며 긴장관계를 구축하는 1980년대 말부터 2010년대까지의 '회귀' 연작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텅 빈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해하는 행동이다. 당신이 분노와 두려움을 몰아내고 자신을 비운다면, 당신은 평온에 도달할 수 있을것이다. 서양 사람인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개발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자아를 무화 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들을 추구하고 있다.” (김창열, 1988) 타이틀 ‘The Path’는 동양 철학의 핵심인 ‘도리(道理)’를 함축하고 있다. 평생 물방울을 그리고 문자를 쓰는 수행과 같은 창작을 이어간 김창열이 도달한 ‘진리 추구’의 삶과 태도를 은유한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