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감독 이정재 딱 절반의 성공…'헌트'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이정재는 밀어붙인다. 정우성은 퍼붓는다. 영화 '헌트'에는 이전에 나온 어떤 한국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강력한 총기 액션이 수차례 나온다. 총 1만발의 총알을 쏟아부은 이 화력이 곧 이 영화의 목표다. 그건 마치 들끓는 에너지로 관객을 압도하겠다는 의지다. 감독 이정재의 야심과 결기는 최근 수년 간 데뷔한 어떤 연출가도 보여주지 못한 태도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연출 데뷔는 성공적이다. 게다가 이정재와 정우성을 23년만에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영화같은 일이다.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채워지는 만족감이 있다. 다만 '헌트'에는 이정재의 고투와 정우성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이 결함은 영화 전체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한편 극적 재미마저 반감시킨다. '헌트'에는 이제 막 데뷔한 감독의 주눅이 없다. 이정재 감독은 데뷔 30년차 슈퍼스타에게만 있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스크린을 과감하게 장악한다. 자신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이 작품이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차용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동백림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미그기 귀순 사건, 아웅산 테러 등을 직·간접적으로 아우르며 전진한다. 각기 다른 시기에 벌어진 이 사건들을 하나의 시간대로 꿰어낸 뒤 가상의 큰 사건 안에 집어넣는 이 설정은 어떤 장르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대범한 시도다. 자칫 아귀가 맞지 않으면 사건을 병렬한다는 인상을 주겠지만, '헌트'는 이들 사건을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규모로 배치해 이른바 '첩보액션'이라는 이 영화 장르의 맛을 살린다. '헌트'는 이야기의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걸 배우의 존재감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만약 그 배우가 이정재와 정우성이라면 그건 정말로 어느 정도 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스파이 영화로서 이 작품의 서스펜스는 대체로 두 배우의 연기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마주보고 있기만 해도 관객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하게 된다는 것. 두 배우는 베테랑 중 베테랑답게 삭힐 때와 터뜨릴 때를 절묘하게 구분하며, 팽팽히 유지되던 긴장감이 폭발할 때의 카타르시스에 힘을 보탠다. 그들의 역할이나 연기력을 떠나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얼굴인 두 배우가 1999년 '태양은 없다' 이후 20여년만에 한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헌트'는 생명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배우의 존재감과 함께 '헌트'의 액션 시퀀스가 보여주는 물량공세는 특기할 만하다. 이 영화는 액션 역시 쪼잔하게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영화의 액션은 돈을 썼으면 돈 쓴 티가 나야 하고, 그 돈을 썼으면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헌트' 제작비는 약 200억원이다). 다시 말해 제작비가 넉넉하다고 해서 액션 장면의 쾌감이 반드시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돈 없이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헌트'가 총알 1만발을 후려갈기고, 차 520대를 동원해 온통 때려부수는 것처럼 말이다. '현트'의 액션 시퀀스는 창의적이고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순 없어도 영화가 끝나도 총소리가 귀에 맴돌 정도로 장관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다만 '헌트'에는 이런 장점들로는 가릴 수 없는 뚜렷한 결점이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관객이 가진 한국 현대사 지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말해 한국 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관객이 본다면 '헌트'는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은 것 이상으로 뜬구름 잡는 듯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헌트'의 서사를 따라가려면 최소한 세 가지 정보를 미리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전두환이라는 존재, 또 하나는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분단 이후 남북 관계다. 지난 5월 '헌트'가 칸에서 공개됐을 당시, 해외 매체들이 "각본이 허술하다"는 공통된 평을 내놓은 건 그들이 위 세 가지 정보를 거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첩보액션이라는 이 영화엔 첩보는 증발해버리고 액션만 남게 된다. 광폭으로 움직이는 대신 세부사항을 거의 챙기지 못한 '헌트'의 스토리는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두 인물이 어떤 캐릭터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모호함 자체가 두 인물의 캐릭터라는 것과 캐릭터 자체가 모호하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가령 5·18을 모르면 김정도를, 남북관계를 알지 못 하면 박평호를 해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두 사람의 이해되지 않는 행보는 종반부 박평호와 김정도의 결정적인 선택에 의문을 품게 하고, 이는 감정이 가장 고조돼야 할 순간에 관객이 몰입할 수 없게 막는다. 이와 함께 플래쉬백을 너무 자주 사용하는 연출 방식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또 첩보전의 긴장감이 각본의 치밀함에서 나오지 못하고 대체로 배우가 가진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역시 큰 단점 중 하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