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삼국지의 영웅들, 와인을 마시다
[서울=뉴시스] 한무제(BC 156~BC 87)는 장건이 들여온 포도나무를 궁중에 심고 직접 가지치기를 하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 태후에게 와인을 올리고 서왕모(西王母) 여신을 위한 제사에도 와인을 바쳤다. 이 때 중국 본토에서는 와인이 아직 제대로 생산되지는 않았다. 대신 장건이 개척한 길을 통해 페르가나, 신장 등 서역에서 직접 수입했다. 한무제는 BC 129년부터 30여년간 계속된 대 흉노 전쟁을 통해 BC 101년 하서회랑을 완전히 확보하고, 하서 4군을 설치했다. BC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해 페르가나를 정벌하고 한혈마 3천필을 얻어오는 등 서역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흉노와는 10년 넘게 지루한 공방전을 주고받았다. BC 90년에는 오히려 흉노에게 대패한다. 내몽고의 항가이 산맥 속야오(速邪烏)에서 벌어진 ‘연연산전투’(燕然山戰鬪)다. 이 전투는 와인과도 관련이 있다. 14만 한나라군과 10만 흉노군이 맞붙은 이 전투에서 한나라는 처참하게 패하고 대장군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했다. 110년전 고조 유방의 백등산 참패 이후 흉노에게 당한 가장 큰 패배였다. 이 전투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흉노의 왕 호록고 선우(狐鹿姑 單于)는 백등산 전투 이래 60년간 계속되다 한무제가 중단했던 조공을 조건을 바꿔 다시 요구한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둘째, 한나라 황실의 여자를 보내 혼인한다. 셋째, 매년 포도주 1만석과 도정한 곡식 5000곡, 비단 1만필을 제공한다. 넷째, 그 외 옛날의 약속을 지킨다. 곡식 5천곡은 100톤, 포도주 1만석은 40만 리터에 달한다. 영국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1587년 스페인 카디즈에서 약탈한 45만 리터의 세리 주가 16세기 영국 상류층 사회에 세리 주 유행을 불러왔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다. 흉노는 포도주를 ‘我蘖酒’(아얼주)라 표기했는데 ‘우리 술’이란 뜻이다. 자체 문자가 없던 흉노는 자신들이 통제했던 서역의 와인을 그렇게 지칭했다. ‘얼주’(蘖酒)는 원래 누룩을 넣어 만든 곡주지만, 와인을 ‘蘖酒’(얼주) 혹은 ‘莫酒’(모주)라 썼다. 한무제는 흉노의 요구를 무시했다. 하지만 3년 후인 기원전 87년 사망하기 전까지 흉노를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흉노도 치명타를 입고 소멸의 길로 들어선다. 서역은 후한 말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거치면서 방치됐고, 당나라 시대까지 간헐적으로 최소한의 영향력만 유지했다. ‘십상시’(十常侍)란 후한 말 27대 영제(靈帝, 156~189) 때,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국정을 농단한 10여명의 환관을 말한다. 장양(張讓)은 그 우두머리였다. 재산이 많은 사업가였던 맹타(孟佗)는 장양에게 와인 1곡을 뇌물로 바치고 양주(凉州)의 자사(刺史) 자리를 얻는다. ‘일곡양주’(一斛凉州)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생겼다. 후한의 도량형 ‘1곡(斛)’은 요즘의 20리터로, 750㎖짜리 와인 27병 정도다. 자사는 주목(州牧)으로도 불렸는데, 각 군(郡)의 태수를 감찰하고 군대의 통솔권을 가진 막강한 자리였다. 녹봉도 2000석이나 됐다. 유비, 조조, 손권이 모두 각 지의 자사 출신이다. 당나라 시대 고선지 장군도 양주 자사 출신이다. 이 당시 십상시의 매관매직에는 가격표가 있어 오수전(五銖錢)으로 현령은 400만전, 자사는 2000만전이었다. 27병 상당의 와인이 2000만전의 가치와 맞먹은 셈이다. 38년 후 조조(曹操, 155~220)가 승상이 됐을 때 식읍 3만호를 제외한 연봉이 곡식 등 현물까지 합쳐 63만전(요즘 우리 돈 4600만원)정도였다. 승상 연봉을 32년간 고스란히 모아야 할 금액이다. 와인 한 방울이 1000전의 가치가 있다는 ‘적적치천전’(滴滴値千錢)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맹타는 양주 자사가 된 첫해인 170년, 3만의 병력을 보내 서역의 소륵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당시 자사 임기는 보통 1년이었으나, 그는 장양에게 와인을 공급하면서 7년이나 버틴다. 삼국지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나오는 맹달(孟達)이 맹타의 아들이다. 맹달도 아버지처럼 뇌물로 관직을 얻었다. 당송팔대가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이를 두고 그의 시 ‘차운진관수재견증’(次韻秦觀秀才見贈)에서 “장수는 100번을 싸워도 제후가 되지 못했는데 맹타는 와인 한 말로 양주 자사를 얻었다”(장군백전경불후 백랑일두득양주, 將軍白戰竟不候 伯郞一 斗 得凉州)고 풍자했다. 십상시의 난에 이어 189년 후한의 왕실을 장악해 삼국시대의 단초를 제공한 동탁(董卓, 139~192)은 양주의 농서군(隴西郡) 출신이다. 술을 좋아했고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점 등을 생각하면 동탁 역시 와인을 마셨을 것으로 보인다. 한 때 동탁의 휘하에 있었던 여포(呂布)도 마찬가지다. 황제였던 유비(劉備, 161~223)와 손권(孫權, 182~252년)도 와인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손권은 술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술을 강권하는 버릇이 있었다. 조조는 신하들에게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조조의 3남으로 위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조비(曹丕, 187~226)는 칙령인 ‘조군의’(詔群醫)에 “와인은 달고 건강에 좋다. 술도 빨리 깬다”고 적는 등 여러 곳에 와인 예찬을 남겼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