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구라모토 "김제 보리밭 연주, 저에게도 감동이었죠"[문화人터뷰]
지난 16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동그란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안녕하세요. 유키 구라모토입니다. 하지메마시떼(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따뜻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에 장난스러움이 묻어났다. 1999년 48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진 유키 구라모토는 그때부터 매년 한국을 찾았다. 코로나19 기간을 포함해 한 해도 빼놓지 않았다. 40대와, 50대, 60대의 시간들을 국내 팬들과 함께 했다. 그렇게 일흔을 넘기고, 올해 내한 24주년을 맞았다. 올해는 5년 만의 새 앨범 '디어 하트'를 발매하고, 국내 11개 도시에서 전국 투어 콘서트를 갖는다. 19일 광명 공연을 시작으로 20일 성남, 25일 의성, 26일 부산, 27일 양산, 28 경주, 6월 1일 인천, 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4일 청주, 6일 창원, 17일 광주까지 한 달에 이른다. 전국 투어에 앞서 지난 5일과 13일에도 한국에서 별도의 공연을 가졌다. 아찔한 강행군이다. 유키 구라모토는 "젊은 사람들은 본공연 전에 연습을 조금 하고 무대에 오른다"며 "하지만 저는 공연 전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 받아 쉬고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모든 스텝들이 감사하게도 양해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그 시간 동안 체력을 모아서 무대에 오르죠." 이번 내한공연에서는 애절한 선율을 담은 '디어 하트', 그리움을 담은 '로망스 포 피아노', 다양한 감정이 차오르는 해질녘의 풍경을 담은 '인 더 글로어밍' 등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신곡마다 전부 느낌이 달라요. 코로나 기간에 작곡된 곡들이 많죠. '슬픔의 감정', '힘든 시기', '앞으로의 희망'을 담았어요. 사실 작곡을 마쳤지만 이번에 발표하지 않은 곡들도 꽤 있어요."
단 한번의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본에서 달려온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 연주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해질녘 보리밭에서는 피아노가 탄탄하게 고정되지 않아 대표곡 '레이크 루이스'의 트릴(꾸밈음) 부분을 빼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모든 순간은 그에게도 감동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때 직접 찍은 사진을 핸드폰 속에 간직하고 있다. "골목길이고, 보리밭이었지만 스텝들이 상상 이상으로 장소와 시간 설정을 잘 준비해주셔서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해주셨는데, 제 음악보다 스텝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음악의 거장으로 꼽히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 일본의 명문 도쿄공업대학에서 응용물리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고등학생 때 전국 10등을 기록한 수재였고,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성공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음악보다는 앞날이 보장된 길을 선택해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세가 기울었어요. 집도, 피아노도 사라졌어요. 저는 친척집에 맡겨졌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 학교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이 없을 때만 연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어요. 춥거나 더울 때 연습할 수 밖에 없었죠. 추운 겨울 난방이 안되는 음악실에서 장갑을 끼고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학교생활 중 공부가 10%였다면 음악은 90%였어요. 대학에 가기 전에는 지방이라 음악 관련 일이 안 들어왔는데, 도쿄에 갔더니 라운지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클래식이 아니라 재즈, 팝 같은 연주였죠. 피아노를 칠 기회가 학교 음악실과 아르바이트 밖에 없었어요. 맹장염에 걸렸는데 너무 아파서 복대를 하고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있어요. 아프고, 더워서 팬티에 복대만 하고 있었죠. 누가 봤다면 꽤나 안 좋은 모습이었을 거에요."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에 할애했지만 그는 학업을 이어갔고, 석사까지 취득했다. "프로처럼 음악일을 했죠. 그래도 학업을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당장은 좋아도 미래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결정을 최대한 미뤘어요." 그는 끊임없이 작곡하고, 연습하고, 연주했다. 앨범에 들어간 정식 발매곡이 350곡 이상이고, 영화·드라마 등에 삽입된 곡까지 포함하면 1000곡 이상이다. 드라마 '겨울연가', '주몽', 영화 '달콤한 인생' 사운드트랙 등 한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매번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을 선사하는 그에게도 작곡은 힘든 과정이다. "멜로디와 모티브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죠. 따라라~하고 흐르면 답이 돌아오고,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해요. 분위기가 고조되고, 마무리가 되고…. 예로부터 이어져온 작곡 방식이죠. 그런데 이게 정말 힘들어요. 작곡을 끝내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특정할 수 없어요."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70세 정도는 돼야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언급해왔다. "이제 완벽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70세가 돼버렸요. 75세로 바꿀까봐요. 코로나 3년을 더해 73세 정도로 늦추면 안 될까요." "내 피아노는 시속 60km"라고 말했던 유키 구라모토는 칠순을 넘긴 지금도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즐겁게 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에서만 발매했던 곡들을 전세계를 대상으로 발매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또 코로나 3년 동안 건강에 힘을 많이 쏟다보니 더 건강해져서 더 좋은 연주를 선보일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의 연주를 더 기대해주세요."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