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내 이름은 뒷모습입니다…'한 남자'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사고로 사망한 남편이 사실은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 이름은 다니구치 다이스케. 그런데 남편이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다니구치 다이스케인 척하며 살았을 뿐 남편은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닌 어떤 남자였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한 남자'(8월30일)는 이 남자의 정체를 추적한다. 그는 누구이고, 진짜 다니구치 다이스케는 어떻게 된 걸까. 굳이 말하자면 이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 쯤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남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또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장르물을 그럴싸하게 포장 하려는 어설픈 터치가 아니다. '한 남자'는 끈질기게 묻고 또 물으며 관객의 사유를 유도한다. 그렇게 이 작품은 장르를 벗어나 철학으로 나아간다. '한 남자'에 관해 얘기하려면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가 쓴 동명 원작 소설을 언급해야 한다. 이 영화는 원작을 모티브 삼아 재해석을 시도하는 대신 글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 집중한다. 히라노 작가는 일련의 작품을 통해 이른바 분인(分人)을 주창했다. 이 사상의 골자는 인간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개인(個人)이 아니라는 것. 나눠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통일 되지 않는 다양한 면모 혹은 자아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런 분열된 자아의 총합이 한 인간을 구성한다는 얘기다. 이 개념은 삶의 이유로 확장된다. 내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나'가 너무 많이 있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나'가 작게라고 있을 수 있다면 그게 삶을 이어가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한 남자'는 다니구치 다이스케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리에, 이 사건을 파헤치는 변호사 키도 등 다수 등장 인물을 통해 분인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한 남자'는 이처럼 원작에 단단한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영화로서 충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히라노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분인이라는 개념에 관해 알지 못하더라도 스토리를 집중해서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이 도달하려는 곳에 함께 도착할 수 있다. 이시카와 감독은 원작을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절제 돼 있는데다 시종일관 천천히 움직이지만, 이야기를 전진해 가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는 분명 분인주의에 대체로 동의하는 것은 물론 이 개념을 상당 부분 이해한 듯하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을 러닝 타임 122분 안에 정확하고 밀도 높게 담아낸 이시카와 감독의 연출력은 이 영화가 올해 초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포함 8관왕에 오른 걸 납득시킨다. 결국 '한 남자'는 이름에 관한 영화다. 이름은 명칭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 자체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름이 규정하는 단일한 정체성이라는 게 어쩌면 많은 이들의 삶을 옥죄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이름은 성취되지 않고 귀속된다. 다시 말해 타인에 의해 주어진다. 이름이 한 사람의 인생을 함축한 상징적 단어라면,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많은 시간을 남이 정한 것들 혹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남자'는 이름(규정된 삶)이 전부일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작품엔 이름이 바뀌는 사람이 나온다. 이름을 바꾼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름이 바뀐 사람이 있고 이름을 바꿔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내는 사람도 있다. 호적 변경 브로커 오미무라는 키도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키도입니까. 내가 진짜 오미무라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한편 '한 남자'는 뒷모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얼굴이 명확히 정의(定義)된 모습이라면 뒷모습은 정의하기 어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엔 자기 얼굴을 자꾸만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다니구치 다이스케는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본 뒤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키도는 창을 통과한 햇빛이 얼굴에 쏟아지자 커튼을 쳐 빛을 막아버린다. 키도가 다니구치 다이스케 사건에 유독 집착하는 건 이 알 수 없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짧게라도 다른 사람으로 산다. 이때 '한 남자'를 열고 닫는 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금지된 재현>(1937)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거울을 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담긴 이 작품엔 거울에 비친 모습 역시 뒷모습이어서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 서 있다. 츠마부키 사토시와 안도 사쿠라, 두 배우의 호연은 '한 남자'를 완성한다. 한국 관객에겐 청춘 스타로 잘 알려진 츠마부키는 다니구치 다이스케의 삶에 연민하고 공감하는 한편 고뇌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변호사 키도를 건조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 츠마부키는 이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마부키가 아니라 '한 남자'의 츠마부키가 됐다. 안도는 역시 안도 답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데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 불행한 여자 리에가 겪은 고통과 겪고 있는 고통을 모두 느낄 수 있다. '경지에 올라 있다'라는 말 외엔 달리 할 말이 없는 연기다. 츠마부키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안도는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