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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미술관은 예술의 사원

등록 2024-02-21 14:47:57   최종수정 2024-02-29 15: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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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스톤 미술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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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글렌스톤 미술관의 울창한 숲 사이 산책로를 걷다보면, 수줍게 숨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로버트 고버의 ‘부분 매립 싱크 2개’. (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글렌스톤 미술관 본관 파빌리온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면 전체적으로 ‘ㅁ’(미음자) 구조의 전시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축가 토마스 파이퍼가 디자인한 이 건물은 중정 공간에 연못이 있다. 유리로 마감한 회랑 어디에서나 이 연못을 볼 수 있다.

복도에 놓인 예술작품, 유리로 끌어들인 연못(자연), 단정하면서도 단단한 회색의 건축이 한 시야에 담긴다. 에밀리 웨이 레일즈 관장이 말하는 ‘미술관은 예술의 사원’이라는 표현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경건하고, (예술에) 집중해야하는 사원이기에 미술관 내 사진촬영은 금지다. 심지어 작품 설명도 없다. 오롯이 작품과 만나보라는 의미에서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작품 컬렉션

중정을 중심으로 총 11개의 갤러리가 있다. 각 갤러리마다 전시 시작과 끝나는 기간이 달라 거의 매달 새로운 전시가 하나씩은 소개된다. 글렌스톤의 컬렉션은 20~21세기 작품으로 한정된다. ‘우리 시대의 컬렉션’이 글렌스톤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레일즈 관장은 “예술은 역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술관은 그 역사를 조각하는데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글렌스톤 미술관이 담아내려는 역사는 미국의 현대사다.

마르셸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들고 나와 ‘샘’이라고 이름 붙여 작품으로 제시했을 때, 현대미술은 지각변동을 경험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은 파리를 대체할 아트 캐피털로 성장하고 있었고, 뒤샹은 그 한가운데 있었던 작가다. 현대미술사의 중요 순간은 물론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시안 아메리칸 작가 등 다양한 인종의 작가도 동등하게 다루려 노력한다.

레일즈 관장이 제시한 컬렉션 기준은 굉장히 명료하다. ‘예술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작업일 것’. 추상표현주의, 개념주의 등 미술사에서 주요한 작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현재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흑인 작가에 대한 조명, 여성작가 재평가 등 현실인식을 넓히는 정치적 작품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컬렉션이 계속 성장하고 바뀌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파빌리온의 3번방에는 세개의 캔버스가 걸려있다. ‘JULY 16, 1969’, ‘JULY 20, 1969’ ‘JULY 21, 1969’. 단색의 캔버스에 세개의 날짜가 흰색으로 쓰여 있다. 일본의 대표적 개념미술작가로 꼽히는 온 카와라(1932~3014)의 ‘투데이’ 시리즈다.

카와라는 매일 자신이 있는 곳의 언어로 캔버스에 날짜를 썼다. 미국에 있다면 월, 일, 년도 순으로, 일본에 있다면 년도, 월, 일 순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글렌스톤이 소장한 작품은 일명 ‘문 랜딩’(Moon landing) 시리즈로 불린다. 아폴로 11호가 론칭한 날(1969년 7월16일), 달에 착륙한 날(7월20일),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딘 날(7월21일)을 기록한 작업이다. 달 착륙은 미국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카와라의 날짜 기록 작업은 총 2만9711일에 달한다. 이 중 문 랜딩 시리즈를 소장했다는 것은 글렌스톤 컬렉션의 진면목을 단번에 드러낸다. 단순히 자금이 받쳐준다고 가능한 컬렉션이 아니다. 작품을 보는 안목, 컬렉션에 대한 열망,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탄생하는 하나의 결정체다.

각 갤러리에서 펼쳐지는 현대미술의 향연도 멋지지만 개인적으로 본관 파빌리온의 하이라이트는 정원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긴 의자와 책 몇권이 놓인 작은 공간이다. 이곳엔 정원 쪽으로 큰 창문이 나 있을 뿐, 작품은 한 점도 없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황무지의 풍경이 시리게 아름답다. 창가에 가까이 핀 엉겅퀴와 잡풀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나는 광경,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키 큰 나무와 멀리 보이는 구릉까지. 맑은 날은 하늘과 조화가 쨍하게 맞아 떨어지고, 비 오고 흐린 날은 안개가 껴서 운치가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에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 따위 자연에 비할 것이 아니라’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다

본관 파빌리온에서 나오면 별관 파빌리온과 황무지까지 산책로가 이어진다. 별관 파빌리온은 확장 공사 전까지 미술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꺾어지는 길목마다 눈에 담기는 풍경이 바뀐다. 갑자기 숨어있던 카페가 나타나기도 하고, 꽃이 흐드러진 잡목이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이 무심한 듯한 정원은 사실 섬세한 큐레이팅 끝에 탄생했다. PWP Landscape Architecture가 디자인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미술관 확장공사가 진행된 2013년부터 18년까지 7000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고, 관목은 수 천 그루, 꽃과 허브는 매년 그 종류를 더해가며 정원을 채운다. 미술관은 자생종 식물을 위주로 계속해서 숲을 넓혀가고 관리한다.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글렌스톤 미술관의 평야엔 조각 10여점이 자리 잡고 있다. 제프 쿤스의 ‘스피릿-로커’(Split-Rocker, 2000) 외에도 리처드 세라의 ‘실베스터’(Sylvester, 2001), 토니 스미스의 ‘스머그’(Smug, 1973/2005), 엘스워스 캘리의 ‘무제’(Untitled, 2005) 등을 산책길에 만날 수 있다. 깊은 숲길에선 노루가족도 심심치 않게 만나지만 로버트 고버의 ‘부분 매립 싱크 2개’(Two Partially Buried Sinks, 1986~1987)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달 중순엔 알렉스 다 코르테(Alex Da Corte)의 작품 ‘태양이 현존하는 한’(As Long as the Sun Lasts, 2021)을 추가로 설치했다. 1980년생인 이 작가는 대중문화와 예술사를 넘나들며 다양한 레퍼런스를 활용한다. 최근 설치된 작품도 새서미스트리트의 캐릭터와 칼더, 헐리우드 영화가 섞여있다. 관객이 읽어내는 만큼 이야기는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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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지난 2월 중순 새롭게 설치한 알렉스 다 코르테의 ‘태양이 현존하는 한’(As Long as the Sun Lasts, 2021). (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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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철판을 나선형으로 감은 리처드 세라의 작품 ‘실베스타’. 가장 산업적인 재료인데, 작품 안에서는 가장 자연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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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야외 조각이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높이가 4미터가 넘는 철판을 나선형으로 감은 ‘실베스터’ 안에 들어가면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로 향한다. 조각이 잘라낸 하늘은 지금까지 보았던 하늘과 다른 시야를 선사한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하늘의 조형이 바뀐다. 인간이 만들어낸 작업과 자연의 끊임없는 저항과 조화가 압권이다.

로버트 고버의 작품은 언뜻 보면 2개의 비석처럼 보인다. ‘스머그’는 뜨거운 여름날엔 알루미늄 재료가 팽창하며 내는 독특한 소리가 난다.

모두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다음 주 3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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