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글렌스톤을 조각하는 이들
글렌스톤 미술관③·끝
[서울=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섬세하고 과감하며 아름다운 컬렉션, 이를 품은 신전 같은 전시 공간, 이 모두를 감싸 안은 대자연. ‘탁월하다’(top notch)는 표현이 어울리는 글렌스톤 미술관은 미첼 레일즈와 에밀리 레일즈의 합작품이다. 지금은 슬하에 두 자녀를 둔 부부이지만,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만난 것이 둘 인연의 시작이었다.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서 자란 미첼은 타고난 인수합병 전문가였다. 1984년 형인 스티븐 레일즈와 함께 부동산투자신탁을 인수하고, ‘다나허’(Danaher Corporation)를 설립했다. 형제는 정크본드를 사들여 되파는 방식으로 회사를 키웠다. 처음부터 생명공학, 진단분야의 회사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회사를 사고팔며 부를 축적한 것. 미 포춘 선정 500대 기업에 들 정도로 성장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 과정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사업가라는 비난도 받았다. 1985년 11월 포브스는 급격하게 덩치를 키우는 두 형제를 ‘반바지를 입은 침입자들’(Raiders in short pants)이라는 제하의 짧은 기사로 소개한다. ‘세금을 회피하는 방식이 주요 사업전략인 애송이들(callow youths)’이라는 평도 더해서. 비판의 목소리 커지는 만큼 사업은 승승장구였다. 앞만 보고 달리던 냉철한 사업가 미첼의 인생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헬기 폭발 사고였다. 1988년 러시아로 떠난 여행에서 급유를 위해 잠시 멈추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체가 폭발했다. 바로 옆에서 경험한 죽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야심만만하고 돈만 알던 사업가는 사라졌다. 삶에서 우선 순위가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작품은 이전부터도 컬렉션했지만, 이후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글렌스톤 미술관이 위치한 곳은 사실 미첼이 거주용으로 구매한 부지다(그는 현재도 미술관 근처에 거주하고 있다). 자신의 컬렉션을 일반대중과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2006년 미술관을 시작하면서 에밀리가 큐레이터로 합류했다. 캐나다 벤쿠버 출신의 중국 이민자 2세였던 에밀리는 대학에서 중국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관 인턴을 거쳐 갤러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칼더, 로스코, 폴록 등 저명한 미국 거장의 작품이 주를 이뤘던 미첼의 컬렉션은 에밀리를 만난 이후 역동성을 더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 마이클 하이저, 로니 혼, 루이스 부르주아, 찰스 레이 등 미술사에서 새로 조명하기 시작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풍성하고 입체적인 컬렉션으로 변한 것이다. 미술관 재개관 당시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데이비드 즈위너는 “에밀리는 국제적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열어줬다. 독일 예술가, 미니멀리즘, 90년대 등장한 젊은 예술가 그룹도 더해졌다”고 평했다. 2008년 미첼이 에밀리와 재혼하며, 글렌스톤 미술관은 이 열정적인 슈퍼 컬렉터 부부의 상징이 됐다. 확장공사를 위해 2억 달러가 넘는 예산이 소요된 것에 더해 부부는 2023년 2월 미술관에 19억 달러를 기부했다. 이로써 미술관 순자산은 46억 달러로 늘었는데, 이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맞먹는 규모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컬렉션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미술관도 활발하게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미첼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2018년 9월)에서 “우리가 죽을 때 돈을 가지고 지구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은 자녀와 손주들에게 돈을 직접 쥐어주기보다, 우리가 운 좋게 번 돈을 다른 곳에 재분배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들에게 글렌스톤 미술관은 세금피난처도, 미술투자처도 아니다.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나 ‘레일즈 부부’가 사라져도 역사 속에 기록되는 중요한 작품들의 안식처이길 바라는 듯하다. (다음 주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