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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이 고통 직시하고 직면하라 '마리우폴에서의 20일'

등록 2024-11-06 06:01:00   최종수정 2024-11-25 09: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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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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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마리우폴에서의 20일'(11월6일 공개)은 올해 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오스카를 손에 넣은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Mstyslav Chernov·39) 감독은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참담해보였다. 그가 "이건 우크라이나가 받은 첫 번째 오스카"라고 말했을 때,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오자 옅은 미소를 보인 게 다였다. 당시 체르노우 감독은 언제라도 무너질 듯한 비통에 빠진 것만 같았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을 보고 나면 그때 그의 통탄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지난달 30일 국내 시사회가 열렸고, 영화가 시작된 지 단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탄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으며, 끊이지 않는 얕은 울음 소리에 극장 안 어둠은 더 칠흑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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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24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공습을 시작했다. 이 군사적 요충지는 3개월을 채 버티지 못하고 그해 5월20일 러시아 손에 넘어갔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러시아군 침공이 시작된 날인 2월24일부터 20일 동안 마리우폴 곳곳을 누비며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진과 영상에 담아 세계에 알린 AP통신 기자들의 기록이다. 당시 생사를 오가며 러시아군 만행을 취재한 당사자가 AP통신 영상기자 체르노우 감독이다. 그리고 현장 프로듀서 바실리사 스테파넨코, 사진 기자 에우게니이 말로레카가 함께 거기 있었다. 전쟁 발발 소식에 마리우폴에 있던 기자들은 탈출했다. 모두가 빠져나올 때, 체르노우 감독 일행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마리우폴에 있던 유일한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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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기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 고통스러워야 한다." 체르노우 감독은 내레이션으로 이렇게 말한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의 유일한 형식은 직면(直面)이다. 제세동기 충격에 들썩이는 3살 아기의 몸, 그 작은 몸을 어찌할 수 없어 울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 숨이 멎은 채 엄마 품에 안겨 온 피 흘리는 18개월 아기, 영안실 자리가 없어 보자기에 싸여 지하실에 방치된 아기 시신, 다리가 잘린 소년, 절망하는 아버지, 건물 잔해에 깔려 나오지 못한 채 눈만 껌뻑이는 아이, 골반뼈가 바스라진 임신부, 길에 널부러진 시체, 어떤 존중도 받지 못한 채 땅구덩이에 던져진 죽은 이들. 분노한 의사는 취재진에게 말한다. "들어오세요. 이걸 낱낱이 다 찍으세요. 찍어서 푸틴에게 보여주세요.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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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폴에서의 20일'의 저널리즘은 직시(直視)다. 기자들은 기자라는 말에 담긴 의미 그대로 보고 또 보려하며,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체르노우 감독 포함 취재진 역시 우크라이나인. 조국에서 무고한 이들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광경에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리 없지만 그들은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일부 시민은 그들의 취재를 비난하나 그럼에도 기어코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 기자 정신을 수호하는 건 마리우폴 시민이다. 그들은 귀하디 귀한 발전기 전력을 기자들이 카메라를 충전하는 데 쓰게 한다. 경찰과 군인은 취재진을 엄호하며 사진과 영상을 전송할 수 있게 돕고, 취재진이 모든 자료를 가지고 마리우폴을 탈출해 이 모든 참상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지원한다. "당신들이 찍은 게 전쟁의 흐름을 바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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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영광을 러시아가 우리 국민 수만명을 죽이지 않은 세상과, 갇혀 있는 인질들이 석방되고, 고국과 시민을 지키다 감옥에 갇힌 군인들이 풀려나는 세상과 바꾸고 싶다.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순 없다. 그러나 영화엔 미래를 바꿔놓는 힘이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기록하고, 진실이 널리 퍼지게 하며, 마리우폴의 시민들과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잊히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체르노우 감독은 오스카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오늘날 전쟁의 참상을 정확하게 담은 기록이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반전 다큐멘터리이며, 꺾이지 않는 기자 정신을 담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 수라장엔 신이 없을지라도 위대한 인간 정신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걸 확인해주는 역사다. 하지만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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