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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고 김병기 선생의 선물, ‘백 년을 그리다’

등록 2022-04-2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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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백 년을 그리다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2.04.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뉴스를 끊고 살다 묵은 소식 중 하나를 뒤늦게 들었다. 한 달 전 화가 김병기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다.

김 선생은 100세를 넘겨 사셨다. 천수를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2016년 사망한 박용구(1914년생) 선생에 이어 김병기(1916년생) 선생까지 사망하면서 1930년대 우리 문화예술계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그들이 가진 기억과 체험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그들의 시대는 역사 속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김 선생의 부친 유방 김찬영은 우리나라에서 서양 미술을 처음 배워 온 화가였다. 1910년대 후반부터 ‘폐허’ ‘창조’ ‘영대’의 동인으로 활동하는 등 문학과 미술 분야 전반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의 문예 활동이란 것은 취미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다. 평양의 손꼽히는 갑부 출신이었기에 그림을 그려 돈을 벌어야 하거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할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 식민지 출신이라는 핸디캡도 그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이란 그렇게 치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찬영은 192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인 사업가로 활동했다. ‘기신양행’이라는 외국영화 수입사를 세웠고, 서울에서 영화관 ‘조선극장’과 평양에서 인쇄소 ‘기신사’를 운영했다. 이들 회사도 전문 경영인을 두어 관리했을 뿐 직접 경영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아들 김병기도 아버지의 재능과 영향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서울에서 따로 살림을 차리고 있던 아버지는 가까이하기 힘든 어려운 존재였다. 거기에 당대 유명인사인 아버지의 이름은 마치 그림자처럼 평생 그의 삶을 지배했다. 화가로서 그의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그는 최초의 서양화가 김찬영의 아들일 뿐이었다.

김 선생이 철이 들기 시작한 후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은 평양과 도쿄에서 만난 또래들이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사그라진 그 자리에 모더니즘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화와 연극, 미술에 두루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고향의 선후배들인 오영진, 주영섭과 같은 연극·영화계 인물, 잠시 도쿄의 하숙에 재워주기도 했던 이상과 같은 문인, 도쿄에서 함께 미술을 했던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문학수와 같은 동료 미술가 등과 친교를 가졌다. 이들 모두 남북한의 50-60년대 문화예술계의 중추를 담당했던 인물들이다.

100년이 넘는 삶을 살면서 그가 품고 있던 이야기는 다행히도 ‘백 년을 그리다’(한겨레출판, 2018)라는 책에 담겼다. 그가 말년에 깊은 친교를 맺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과 인터뷰한 내용이 한겨레신문에 연재됐고, 이후 책으로 엮였다. 책에는 우리 문화예술계를 이끈 1930년대 젊은 문학 예술인들의 풍경, 해방 전후의 급박했던 모습, 1950년대 추상미술로 옮겨가기 시작한 한국 화단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반가웠던 것은 1930년대 후반에 평양 출신들이 주로 가담해 활동했던 ‘도쿄학생예술좌’ ‘삼사문학’ 등과 같은 익숙하지만 그 속살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단체와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해 상세히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북한의 문학, 예술계에 중요하게 활약했던 인물들과 그 활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 또 해방 직후 평양과 서울의 우익 정치인들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비사도 담겨있다.

이렇듯 그가 품은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 년을 그리다’는 화가 김병기가 말년에 우리에게 남긴 선물 같은 책이라 말할 수 있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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